책읽기

모순 _ 양귀자

한 용 석 2018. 3. 13. 13:00

생의 외침

P20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삶에 대해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 대로 놓아 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인생인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사람이 있는 풍경

P71

 그리고 나영규는 차를 돌려 떠났다. 나 또한 미련 없이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골목 입구의 구멍가게에 하늘색 공중전화가 놓여 있다는 생각은 하필 그 순간에 왜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가방을 뒤져 동전을 찾았다. 누군가와 밤이 새도록 통화를 해도 남을 만큼 동전은 넘치도록 많았다. 하늘색 공중전화기도 얌전하게 입을 다물과 자신의 몸을 눌러 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나 또한 수첩을 보지 않고도 거침없이 누를 수 있는 일곱 개의 숫자를 하나 알고 있었다.

 동전이 떨어진 것은 신호음이 두 번 울린 다음이었다. 그는 집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 박자쯤 쉰 후에 "여보세요"하고 말할 참이었다. 그런데, 나의 "여보세요" 소리를 기다리지도 않고 기계음이 흘러 나왔다.

 "김장웁니다. 지금은 남도로 여행 중입니다. 전하실 말씀을 남겨 주세요…삐이……."

 삐이…신호음이 울렸지만 나는 아무것도 남길 말이 없었다. 김장우의 선량한 음성만 귓전에 맴돌았다. 언제라도 가방만 둘러메고 떠나는 데 익숙한 김장우였다. 그는 전문적으로 야생화만 촬영하는 사진작가였다. 하지만 오늘 남도로 촬영 여행을 떠난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이렇게 해석해 보았다. 김장웁니다. 안진진과 일요일을 함께 보내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아서 쓸쓸하게 남도로 떠납니다. 쓸쓸함이 가시면 돌아오겠습니다…….

 내 마음대로 해석한 김장우의 전화 메시지 때문에 나는 쉽게 하늘색 전화기 앞을 떠날 수 없었다. 동전은 넘치도록 많은데. 뒤에서 빨리 끊어 달라고 재촉하는 사람도 없는데, 조용조용 꽃가지를 흔들고 있는 라일락은 저리도 아름다운데, 밤공기 속에 흩어지는 이 라일락 향기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은은하기만 한데…….


희미한 사랑이 그림자

P96

 '언제나 최고의 셔터 찬스는 한 번뿐, 두 번 다시는 오지 않는다. 좋다고 느껴지면 망설이지 말고 무조건 셔터를 눌러야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훌륭한 순간 포착, 그곳에 사진의 진가가 존재한다.'

김장우는 여러 번 내 앞에서 이 문장을 암송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감동적인 인물 사진을 주로 발표하는 작가의 메시지였다. 나는 그것에 빗대 보는 것이다.

 "사진은 그렇게 잘 찍으면서 다른 일은 왜 그게 안 되지요? 인생의 모든 기회가 다 마찬가지 아닌가요? 훌륭한 순간 포착, 거기에 진짜 인생이 존재한다……."

 그러면 김장우는 이렇게 변명했다.

 "안진진. 인생은 한 장의 사진이 아냐. 잘못 찍었다 싶으면 인화하지 않고 버리면 되는 사진하고는 달라. 그럴 수는 없어."

 하긴 그랬다. 사진은 집합체인 것을. 멈춰 놓고 들여다볼 수 있는 게 아닌 것을…….


오래 전, 그 십 분의 의미

P116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큰 은혜는 꼭 돌려 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

P176

 "왜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았어요?"

 카메라가 없으면서도 버릇처럼 이쪽 저쪽으로 구도를 잡아 보며 한참 동안 꽃 옆을 떠날 줄 모르는 김장우.

 "있으면 찍으니까. 보지는 못하고 찍기만 하니까."

 "그래요 맞는 말이에요."

 나는 김장우의 말을 이해했다.

 "이유야 또 있지. 안진진이 있잖아. 옆에서 말도 해주고 같이 웃어 주고 쉴새없이 숨소리를 내는 안진진이 있어서 순간순간이 충만할 텐데 뭣 때문에 카메라를 가져오겠니. 나는 이번 여행에서 사랑하는 꽃이름을 불러 주는 대신 안진진의 이름만 열심히 부르기로 결심했어."


모순

P271

 옛날, 창고 방패를 만들어 파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이 창은 모든 방패를 뚫는다.

 그리고 그는 또 말했다.

 이 방패는 모든 창을 막아 낸다.

 그러자 사람들이 물었다.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는가.

 창과 방패를 파는 사람은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P272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늘 같은 분랴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이모는 죽음으로 내게 가르쳐 주었다. 이모의 가르침대로 하자면 나는 김장우의 손을 잡아야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이모의 죽음이 나로 하여금 김장우의 손을 놓아 버리게 만들기도 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하게 보여졌던 이모의 삶이 스스로에겐 한없는 불행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들에게 불행하게 비쳤던 어머니의 삶이 이모에게는 행복이었다면, 남은 것은 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이었다.

 나는 내게 없었던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전에도 없었고, 김장우와 결혼하면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한 그것, 그것을 나는 나영규에게서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이모가 그토록이나 못 견뎌했던 '무덤 속 같은 평온'이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일 년쯤 전,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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