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깊은 슬픔 _ 신경숙

한 용 석 2018. 1. 23. 14:32

P196

  그녀는 불 꺼진 창을 자신의 창을 남의 집 창처럼 봤다.

  불빛이 흘러나오는 창이 좋아서 한때 그녀는 나올 때마다 일부러 불을 켜놓고 나오기도 했다. 불을 켜놓고 나오는 걸 잊고 엘리베이터를 타면 다시 가서 켜놓고 나오기도 했다.

 한동안은 비록 자신이 켜놓은 불이긴 하지만 늦은 귀갓길, 밑에서 문득 창을 올려다볼 때 흘러나오는 그 불빛이 화들짝 반갑고는 했다. 그럴 때는 손에 무언가를 사들고 집에 돌아오는 사람들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 불을 켜놓고 외출하는 걸 그만두었다. 더이상 마음이 속아주질 않았다. 처음 한동안은 불을 켜놓고 나간 걸 먼저 생각 못 하고 불빛을 보면 눈이 빛났으나, 곧 그녀는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불을 켜놓고 나왔지, 라는 생각을 해버렸다.

 불이란 누가 켜줄 때 반갑고 따뜻한 것이지, 일부러 켜놓고 나와 바라보는 건 또다른 모양의 썰렁함일 뿐. 내 방은 누가 불을 켜줄 사람이 없어. 내가 켜고 끄고 해야 해.

 거기다 불빛은 밤을 위해 있는 것인가보았다. 밤늦은 귀가였을 땐 나가 켜놓았지, 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도 그런대로 밑에서 올려다보면 정다웠으나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돌아왔을 땐 기묘했다. 켜놓고 나간 형광등이나 스탠드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이물질처럼 떠다녔다.

 그 빛 아래 드러나는 일상은 뼈다귀 같았다.


P487

 "애들은 저녁밥 먹였어라오."

 아버지에게 김을 드시게 하고 싶은 어머니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진 아랫목에 묻어놓은 뜨거운 밥을 김에 사서 한 장씩 이수와 은서에게 돌렸다. 몇 번 그렇게 번갈아 사주고 나면 아버지 밥그릇은 바닥이 나버리곤 했다. 정작 아버진 한술도 뜨지 않았으면서 어, 잘 먹었다, 며 상을 물렸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그때껏 사랑방에 섞여 있으면서 요기를 안 했을리는 없는 일. 아버진 그때 이수와 은서를 앞에 앉혀놓고 김밥 하나씩 싸서 먹이는 재미로 그 늦은 겨울밤에 일부러 밥상 앞에 앉으셨던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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