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시간의 빛 _ 강운구

한 용 석 2018. 2. 7. 13:03

P27 춘란의 향

 난초는 나약하지 않다. 준수하고 귀티나지만 잡초보다 더 강인하다. 남쪽의 여기저기 마른 비탈의 숲 가장자리에는 난초가 흔했으며, 이른 봄이면 그 향기가 퍼져나갔다. 흑산도에서는 배 타고 가면서 풍란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을 모두 보기 힘들다. 빼어나게 향기 좋은 풍란과 잎이 아름다운 한란은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고, 춘락은 보기 어렵다. 모두 다 그 향기와 끈질긴 생명력 때문에 사람들에게 뽑혀가 화분에서 얼마간 살다가 저 세상으로 간 것이다.

 한때는 서울 광화문 지하도 입구에서 풍란이나 춘란을 가마니로 쌓아놓고 헐값으로 팔기도 했다. 다 저 남쪽의 무인도 같은 곳 절벽에 핀 것들을 쓸어담아다가 여러 사람이 골고루 나눠가진 뒤에 골고루 죽이게 된 것이다. 이 세상은 험해서 자태 귀하고 향내 좋은 것을 결코 그냥 두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향내 같은 것은 서둘러서 버린 것일까? 향내 나는 고귀한 사람을 보기 힘들다. 어쩌다 그런 사람을 보면 죄다 몰려가서 숨막히게 한다.


이 '금수강산'에 꽃이 없다면 봄은 무엇으로 오나.


P202 '한 사날 올랑갑다'

 설원에서 앞이 안 보이게 눈이 올 때 사람들은 어쩌다 자기가 아는 길로 똑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지름이 몇백 미터에서 몇 길로미터나 되는 원을 그리며 빙빙 도는 수가 있다. 안개나 눈보라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또는 그런 와중에서 지쳐, 방향감각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방향감각을 믿는 수가 많다. 앞으로 똑바로 간다고 확신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자리에서 큰 원을 그리며 빙빙 돌다가는 마침내 쓰러지는 조난사고가 있다. 이런 것들을 등산가들은 링 반데룽(Ring Wanderung)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일은 고산의 설원에서보다 우리가 헤매는 삶의 수렁 곳곳에서 더 흔히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진보는 직진만 하는 것일까? 역사는? 지금은? 눈발 자욱한 겨울산이 막막한 눈냄새를 풍기며 침잠한다.

 

'책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순 _ 양귀자  (0) 2018.03.13
너는 모른다 _ 정이현  (0) 2018.02.14
깊은 슬픔 _ 신경숙  (0) 2018.01.23
당신의 신 _ 김숨  (0) 2017.11.27
검은사슴 _ 한강  (0) 2017.1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