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93
안이 장에게 품고 있었던 동경과 호의는 차츰 사그라들엇다. 희생이나 봉사는 타인에게만 가능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부대끼며 서로를 잘 알아갈수록 안은 장에게 소원해졌고, 최근에는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눈치였다.
P103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춘추복을 입은 사내는 앞섶을 여미다 말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너무 들었습니다. 조금만 숙여보십시오."
사내의 경직된 얼굴을 보며 장은 이 사내가 어디에 사진을 쓰려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여권을 만들 일은 없을 것이다. 운전면허가 있어서 갱신한다.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렸다. 그것도 아니었다. 어딘가 일자리를 구하는 것 같았다. 일자리를 구하고 나면 저 사내는 겨울 양복을 사 입을 수 있을까.
두번째 스트로브가 터질 때 사내의 얼굴 위로 깊은 상처의 흔적 같은 초조와 불안, 외로움이 떠올랐다. 그것들은 그야말로 흔적이어서, 섬광과 함께 감쪽같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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