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사소한 부탁 _ 황현산

한 용 석 2018. 8. 28. 09:02

P48 홍어와 근대주의


 홍어는 홍어목 홍엇과에 속하는 납작한 마름모꼴의 물고기로 제대로 성장할 경우 길이가 1.5미터를 넘는다. 제주도에서 흑산도를 거쳐 서해안 일대에 이르는 연안에서 고루 잡히는 바닷고기다. 그러나 옛날부터 홍어를 즐겨 먹었던 전라도 남쪽 해안 지방에서는 전통적으로 동지에서 설날 전후에 이르는 한겨울에 흑산도 근해에 알을 낳으러 왔다가 잡히는 홍어를 특정해서 '홍어'라고 부른다. 그것이 '진자 홍어'다. 물고기의 맛을 결정하는 것은 그 물고기가 잡히는 바다의 플랑크톤인데, 한겨울의 흑산도 바다에는 발광 플랑크톤이 많다고 한다. 그 발광 플랑크톤이 홍어 피부의 '곱'에 달라붙어 우리가 알기 어려운 어떤 작용을 하는 것이 틀림없다.

 냉동 시설이 없었던 옛날에 홍어회는 겨울에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추수가 완전히 끝난 겨울에, 혼례를 치르는 집에서는 잔치 음식의 기본으로 돼지 한 마리와 홍어 한 닢을 준비한다. 거기에 김장 김치를 곁들이면 자연스럽게 삼합이 된다. 잔칫상에 반드시 홍어가 놓여야 하는 것은 막걸리 안주로 홍어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적당하게 삭힌 홍어 한 점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어금니와 볼 사이에 그것을 밀어넣고 제대로 빚은 막걸리를 마시면 무어라고 설명할 수 없는 맛이 난다. 그래서 '홍탁'이라는 말이 생겼다. 막걸리 없는 홍어회는 완전한 홍어회가 아니다.

 어느 입심 좋은 사람의 책에서 삭힌 홍어의 유래를 설명하는 글을 읽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흑산 앞바다에서 홍어를 잡아 열흘넘게 배에 실어 목포나 영산포로 운송하는 동안 신선도를 잃고 부패한 홍어에, 암모니아성의 역한 냄새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대로 독특한 맛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럴듯한 말이지만, 나 같은 홍어의 본고장 사람이 듣기에는 가당치도 않은 설명이다. 냉동 시설이 없는 옛날에도 어부들은 끊임없이 바닷물을 길어 생선에 붓는 방식 등으로 상당한 기간 그 선도를 유지할 줄 알았다. 그래서 연평도에서 잡은 조기나 신안에서 잡은민어가 신선한 상태로 서울 사람의 밥상에 오를 수 있었다. 더구나 홍어는 겨울에 잡는 물고기여서 열흘이나 보름 안에 부패할 수는 없다. 내가 중학생이던 1950년대 말말 해도 연안 어선은 거의 모두 예날과 다름없는 돛단배들이었지만 어시장에 부려진 홍어는 싱싱했다. 삭히느냐 마느냐는 먹는 사람의 일이었다. 우리집에서는 어른들이 홍어 한닢을 사오면 대개 연골이 붙은 부분은 삭혀 술안주로 썼지만, 양날개의 신선한 살은 양념간장을 발라 구워 반찬으로 썼다.


P170 두 개의 시간

 고향이 서남해안 지방인 우리집은 언제난 섣달그믐날에 차례상을 차려왔다. 그 섣달이나 그믐이 늘 음력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었지만, 어쩌다 양력설을 쇨 뻔한 적은 있었다. 내가 대학생일 때, 배운 자식들의 권에 못 이겨 신정 과세를 하기로 결정을 내린 어머니가 차례상을 준비하던 중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손에 든 접시를 내려놓으셨다. "오늘 차례 못 지낸다. 어찌 섣달그믐에 달이 뜬단 말이냐." 양력과 음력의 개념과 차이에 관해 설명할 계제가 아니었다. 어떤 설명도 설날의 밤하늘이 지녀야 하는 유현한 기운을 어머니의 마음속에 만들어줄 수는 없었다.

 바닷가 사람들인 우리 가족에게 시간은 늘 썰물 밀물과 연결되어 있다. 이 시간의 리듬은 곧 달의 숨결이며, 우주의 율려이다. 이 박자를 짚어 비도 오고 바람도 분다. 적어도 바닷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사리 때인 보름이나 그믐에는 날이 맑고 그 사이에 있는 조금 때는 비가 온다. 초등학고 때 학교는 늘 이리듬을 염두에 두고 소풍이나 운동회 날짜를 정했으며, 그 결정이 낭패한 적은 없었다.흘러가는 시간을 균일하게 분할해놓은 것이 달력이지만 거기에는 천지의 리듬도 함께 표시된다. 보름에는 만월이고 삭망네는 달이 없다. 보이 오고 가을이 오는 태양의 변화야말로 간만의 변화보다 훨씬 더 강력한 리듬이지만 그것은 강한 권력과도 같기에 리듬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법칙처럼 여겨진다. 사실상 양력에 해당하는 24절기는 책력에서 지극히 합리적으로 배열되었지만 달력의 기본이 되는 월과 일이다. 농사는 절기에 따라 짓고 제사는 날짜에 따라 지낸다. 양력에는 공식적인 삶이 있지만 음력에는 내밀한 삶이 있다.


P273 시간과 기호를 넘어서서 1

 "호반문장 먹이 없느냐, 오뉴월 바쁜 날 팔이 모자라냐, 죽으면 널이 없느냐." 전라도 어촌에서 갑오징어를 기리는 말이다. '호반문장'은 무인과 문인을 함께 뭉뚱그리는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그저 문장가를 구성지게 부르는 말이다. '널'은 널판인데, 널판으로 짓게 마련인 관도 널이라고 말한다. 갑오징어에게는 문장가라면 필히 지녀야 할 먹이 있으며, 여덟 개의 팔이 있어 한꺼번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며, 관보다는 배를 닮은 오징어 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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