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42
폐목강심(閉目降心) 눈을 감고 마음을 내려놓다
병 때문에 한가함 얻어 나쁘지만 않으니,
마음 편한 게 약이지 다른 처방 없다네.
혜가가 달마에게 물었다.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가라앉혀주십시오." 달마가 말했다. "그 마음을 이리 가져오너라. 편안하게 해주마." 혜가가 궁리하다가 말했다. "찾아보았지만 못 찾겠습니다." "그럼 됐구나."
생각이 길을 못 열면 답답함이 몸속에 화기로 쌓인다. 불은 위로 솟는다. 화기가 돌아 몸을 접히지 못하고 위로만 뻗치면 정신을 태워 심신의 균형이 무너진다. 눈을 감으면 생각이 괴물로 변해 나를 덮칠 기세더니, 마음을 내려놓자 눈앞에서 차츰 잡생각이 잦아든다.
P49
소지유모(小智惟謀) 못난 자가 잔머리를 굴린다
군자는 먼저 가리고 나서 사귀고, 소인은 우선 사귄 뒤에 택한다.
그래서 군자는 허물이 적고, 소인은 원망이 많다.
재주가 높은 것은 지혜가 아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드러나지 않는다. 지위가 높으면 실로 위험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리로 나아가지 않는다. 큰 지혜는 멈춤을 알지만, 작은 지혜는 꾀하기만 한다.
- 큰 지혜는 난관에 처했을 때 멈출 줄 알아 파멸로 내단는 법이 없다. 스스로 똑똑하다 믿는 소지는 문제 앞에서 끊임없이 잔머리를 굴리고 일을 꾸미다 제풀에 엎어진다.
지혜가 미치지 못하면 큰일을 도모하는 자는 무너진다. 지혜를 멈춤 없이 아득한 것만 꾀하는 자는 엎어진다.
-멈춤을 모르고 기세를 돋워 벼랑 끝을 향해 돌진한다.
권세는 무상한지라 어진 이는 믿지 않는다. 권세에는 흉함이 깃든 까닭에 지혜로운 자는 뽐내지 않는다.
-얼마 못 갈 권세를 믿고 멋대로 굴면 파멸이 코앞에 있다.
왕노릇 하는 사람은 쟁변하지 않는다.
말로 다투면 위엄이 줄어든다.
지혜로운 자는 말이 어눌하다.
어눌하면 적을 미혹케 한다.
용감한 사람은 말이 없다.
말을 하면 행함에 멈칫대게 된다.
-말로 싸워 이기고 달변으로 상대를 꺾는 것은 잠깐은 통쾌해도 제 위엄을 깎고 상대가 나를 만만히 보게 만든다. 어눌한 듯 아예 말을 멈출 때 가늠할 수 없는 깊이와 힘이 생긴다. 그침의 미학!
P65
폐추자진(敝帚自珍) 보배로운 몽당 빗자루
제 집에서 쓰는 몽당비가 남 보기엔 아무 쓸모가 없어도, 제 손에 알맞게 길이든지라 보배로 대접을 받는다는 의미로 쓰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애지중지하는 몽당빗자루가 있다. 하지만 남은 그 값을 안쳐주니 문제와 갈등이 생긴다.
P73
조존사망(操存舍亡) 붙들어야 남고 놓으면 놓친다
맹자는 "붙들면 보존되고 놓아두면 달아난다"고 했다. 붙들어 간직해야지 방심해 놓아두면 마음이 밖에 나가 제멋대로 논다.
마음이 달아난 자리에는 잡된 생각이 들어와 논다. 쓸데없는 생각을 깨끗이 닦아내야 영대가 거울처럼 빛나, 사물이 그 참모습을 드러낸다.
좋은 일은 늘 힘들다. 애써서 이루는 일이라야 가치가 있다. 거저 얻어지고 저절로 되는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P76
팔십종수(八十種樹) 너무 늦은 때는 없다
씨를 뿌리면 나무는 자란다. 설사 내가 그 열매를 못 딴들 어떠랴.
P100
후피만두(厚皮饅頭) 생김새부터 속물이다
생긴 것은 만두인데 껍질이 두꺼워 차마 먹기가 괴롭다. 글이 정곡을 꽉 찔러서 정신이 번쩍 들게 해야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조차 없게 썼다는 얘기다.
P103
신기위괴(新奇爲怪) 혼동하기 쉬운 것들
나약함은 어진 것처럼 보이고
잔인함을 의로움과 혼동된다.
욕심은 성실함과 헷갈리고
망령됨은 곧음과 비슷하다.
청렴하되 각박하지 않고
화합하되 휩쓸리지 않는다.
엄격하나 잔인하지 않고
너그러워도 느슨하지 않다.
P106
당면토장(當面土檣) 벽에 대고 말하기
흙벽과 마주하고 앉은 느낌
듣지도 않고 언성부터 높이지만 결국은 같은 소리다. 처음부터 알맹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르다는 소리만 들으면 된다. 지금돠 사람들은 같은 말을 다른 듯이 사생결단하고 싸운다.
P123
관규여측 _ 대롱 구멍으로 하늘을 보다
대롱의 구멍으로 하늘을 살피고, 전복 껍데기로 바닷물의 양을 헤아린다는 뜻이다. 좁은 소견의 비유로 쓴다. 연석은 옥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그냥 돌이다. 송나라 사람이 보옥으로 알고 애지중지하다가 망신만 크게 샀다. 초나라 행인은 산계를 봉황으로 잘못 알아 큰돈을 주고 샀다. 임금에게 바치려다 산계가 죽자 봉황을 잃었다며 발을 굴렀다.
지금 사람들은 조금만 서사를 섭렵하고 나면 문득 함부로 잘난체하여 저만 옳고 남은 그르다 한다. 한 편의 기이한 글을 보면 스스로 세상에 우뚝한 학문으로 여기고, 어려운 한 글자를 외우고는 남보다 뛰어난 견해로 생각한다. 어쩌다 한 글자의 음을 세상에서 잘못 읽는 줄 알게 되면 그 무식함을 비웃는데, 정작 자기 또한 무수히 오독한 줄은 알지 못한다. 또 어쩌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몹시 궁벽한 구절을 찾고서는 고루하다고 비웃으나, 정작 자기 또한 얼마나 많이 모르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떤 이는 남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잠시 얼버무려 자취를 감추기도 하고, 어떤 이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뽐내며 과장을 일삼아 명성을 훔치기도 한다. 이 같은 무리가 세상에 온통 가득하다.
P129
손이익난(損易益難) 덜기는 쉽고 보태기는 어렵다
쑥쑥 줄고 좀체 늘지는 않는다. 빠져나가는 것은 잘 보여도 들어오는 것은 표시가 안 난다. 오랜 시간 차근차근 쌓아 무너지듯 한꺼번에 잃는다. 지켜야 할 것을 놓치면 우습게 본 일에 발목이 걸려 넘어진다. 기본을 지켜 천천히 쌓아가야 큰 힘이 생긴다. 건강도 국가 운영도 다를 게 없다.
일 없다가 바쁘고, 잘나가다 시비에 휘말려 역경을 만나는 것이 인생이다. 그때마다 주저앉아 세상 탓을 하면 답이 없다. 대숲이 빽빽해도 물을 막지 못한다. 구름은 높은 산을 탓하는 법이 없다. 하루하루를 허투루 살지 않아야 삶의 기쁨이 내 안에 고인다.
P134
처명우난(處名尤難) 이름 앞의 바른 처신
이름 높은 선비를 내 살펴보니
틀림없이 무르이 미움을 받네.
이름 이룸 진실로 쉽지 않지만
이름에 잘 처하긴 더욱 어렵지.
이름이 한 단계 나아갈수록
비방은 열 곱이나 높아만 가네.
-높은 명성의 필연적 대가는 비방과 구설수다. 이름을 이루기가 참 어렵지만, 그 이름을 잘 간수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사람을 대하기가 가장 힘드니
헐뜯는 말 여기에서 들끓는다네.
근엄하면 오만하다 의심을 하고
우스갯말을 하면 얕본다 하지.
눈이 둔해 옛 알던 이 기억 못하면
모두들 교만하다 얘기를 하네.
말에서 안 내렸다 까탈을 잡고
불렀는데 대답 없다 성을 내누나.
-비방은 일거수일투족을 따라다닌다. 앉는 데마다 가시방석이요, 도처에 실족을 기다리는 눈길들이다.
덕은 가벼워서 들기 쉽지만
비방은 무거워서 못 이긴다네.
자기가 높이면 남이 누르고
자신이 내려야 남이 올리지.
부드럽게 처신함 아이 같아야
지극한 도 내 몸에 엉기게 되리.
봉황은 더더욱 몸을 낮추고
기러기도 주살을 두려워하지.
빼어난 기운은 머금어둬야
구름 박차 마침내 날게 되리라.
P141
구전지훼(求全之毁) 예상 못한 칭찬과 뜻하지 않은 비방
맹자가 말했다. "예상치 못한 칭찬이 있고, 온전함을 구하려다 받는 비방이 있다."
- 비난이 예상돼도 옳은 길을 가면 생각지 않은 칭찬이 따르고, 제아무리 그럴싸하게 꾸며도 나쁜 짓은 반드시 들통이 나게 되어 있다.
P148
당심기인(當審基人) 사람 같은 사람이라야
올바른 사람이 칭찬해야 내가 기쁘고, 삿된 자의 칭찬 앞에 나는 두렵다. 사람다운 사람이 손가락질을 하면 나는 무섭고, 사람 같지 않은 인간들이 욕하면 나는 내가 자랑스럽다. 칭찬과 비난은 문제 될 것이 없다. 칭찬받을 만한 사람의 칭찬이라야 칭찬이지, 비난받아 마땅한 자들의 칭찬은 더없는 욕일 뿐이다.
- 칭찬과 비난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어떤 사람이 칭찬하고 비난했는가를 살피는 것이 먼저다.
P168
비대목소(鼻大目小) 수습의 여지는 남겨둔다
새기고 깎는 방법은 코는 크게 하고 눈은 작게 해야 한다. 코가 크면 작게 할 수가 있지만 작게 해놓고 크게 만들 수는 없다. 눈이 작으면 키울 수 있지만, 크게 새긴 것을 작게 고칠 방법은 없다.
일처리도 마찬가지다. 나중에 돌이킬 수 있게 해야 실패하는 일이 적다. 단순명쾌한 것이 시원하다고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상황을 자꾸 내몰면, 물 한 모금 마시려다 머리 박고 고꾸라지는 수가 있다.
P172
검신용물(檢身容物) 사소한 차이를 분별하라
관대한 것과 물러터진 것은 다르다. 굳셈과 과격함은 자주 헷갈린다. 성질부리는 것과 원칙 지키는 것, 잗다란 것과 꼼꼼한 것을 혼동하면 아랫 사람이 피곤하다. 사기꾼처럼 진실해 보이는 사람이 없다. 그래야 상대가 속아 넘어간다. 자리를 못 가리는 것을 남들과 잘 어울리는 것으로 착각해도 안된다. 사람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을 잘 분간해야 한다.
진실한 사람은 외골수인 경우가 많다. 질박하면 멍청하고, 강개하면 속이 좁다. 민첩한 사람에게 꼼꼼함까지 기대하긴 힘들다. 말을 잘하면 행동이 안 따르고, 신의 있는 사람은 얽매는 것이 많다. 그래도 좋은 점을 보아 단점을 포용한다. 나 자신에게 들이대는 잣대는 매섭게, 남에게는 관대하게.
P174
구과십육(口過十六) 입으로 짓는 허물의 가짓수
미수 허목(1595~1682)의 <불여묵전사 노인의 16가지 경계> 노인이 입으로 짓기 쉬운 16가지의 잘못을 경계한 내용.
1. 실없이 시시덕거리는 우스갯말
2. 입만 열면 가무나 여색에 대해 말한다.
3. 재물의 이익에 관한 얘기
4. 걸핏하면 버럭 화를 내는 언사
5. 남의 말은 안 듣고 과격한 말을 쏟아낸다. 교격(橋激)
6. 체모 없이 아첨하는 말
7. 사사로운 속셈을 두어 구차스레 군다.
8. '내가 왕년에……' 운운하며 남을 꺾으려드는 태도
9. 저보다 나은 이를 꺼리는 마음
10. 남이 내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수치로 알아, 듣고 못 견딘다.
11.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아닌 척 꾸민다.
12. 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비방하며 헐뜯는 일이다.
13. 요행으로 곧은 체하며 남에게 큰소리친다.
14. 남의 좋은 점을 칭찬하지 않고 애써 탈을 잡는다.
15. 남의 사소한 잘못도 꼭 드러내 떠벌린다.
16. 당시에 말하기 꺼려하는 얘기나 세상의 변고에 관한 말이다. 이런 노인일수록 입에 '말세'란 말을 달고 산다.
"삼가지 않는 사람은 작게는 욕을 먹고, 크게는 재앙이 그 몸에 미친다. 마땅히 경계할진저!"
16가지 구과를 범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입을 꾹 닫고 침묵하면 된다. 허목이 어떤 말도 침묵만은 못하다는 뜻으로, 자신의 거처 이름을 '불여묵전사 不如默田社'로 붙인 이유다.
P191
인묵수렴(忍默收斂) 말의 품위와 격
옛사람이 말했다. 말은 다 해야 맛이 아니고, 일은 끝장을 보아서는 안 된다. 쑥대에 가득한 바람을 마다하지 말고, 언제나 몸 돌릴 여지는 남겨두어야 한다. 활은 너무 당기면 부러지고, 달은 가득 차면 기울게 마련이다.
- 당장에 상대를 말로 꺾어 기세를 올려도 그 말은 곧바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끝장을 보자는 독설,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독단의 언어는 독이 될 뿐 득이 없다.
최고의 순간에 멈추기는 쉽지 않다. 절정에서 내려서기란 더 어렵다. 뜨거운 욕망의 도가니에서 훌적 뛰쳐나오려면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조금만 더, 한 번만 더, 하다가 굴러떨어지면 그 추락에 날개가 없다. 생각이 깊으면 그 말이 경솔하지 않다. 큰 싸움꾼은 가볍게 싸우지 않는다.
P196
화복상의(禍福相倚) 좋고 나쁨은 내게 달린 일
인간의 화복이 맞물려 있어, 복만 받고 화는 멀리하는 이치란 없다는 뜻이다. 《노자》도 "화는 복이 기대는 바이고, 복은 화가 숨어 있는 곳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변고를 만났을 때 이를 복으로 돌리는 지혜와, 복을 누리면서 그 속에 잠복해 있는 화를 감지해 미연에 이를 막는 슬기를 어떻게 갖추느냐가 문제다. 눈앞의 복에 취해 그것이 천년만년 갈 줄 알고 멋대로 행동하다가 제 발로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재앙을 만나면 세상에 저주를 퍼붓고 하늘을 원망해 복이 기댈 여지를 스스로 없앤다.
공덕천을 맞아들이려면 흑암녀가 따라 들어온다. 흑암녀가 무서운데 공덕천이 어찌 겁나지 않으랴! 좋기만 한 것은 없다. 나쁘기만 한 것도 없다. 나쁜 것을 좋게 돌리고, 좋은 것을 나쁘게 되지 않게 하려면 매사에 삼가고 두려워하는 자세를 잃지 않아야 한다.
P198
득조지방(得鳥之方) 인재를 얻는 그물
《전국책》에 나오는 얘기다. 새를 많이 잡는 방법은 새가 많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중간 지점에 그물을 치는 데 있다. 너무 많은 곳에 그물을 치면 새떼가 놀라 달아나서 일을 그르친다. 전혀 없는 곳에 그물을 펼쳐도 헛수고만 한고 만다.
큰일을 하려면 손발이 되어줄 인재가 필요하다. 거물은 좀체 움직이려 들지 않고 거들먹거리기만 한다. 상전 노릇만 하다가 조금만 소홀해도 비웃으며 떠나간다. 소인배는 쉬 감격해서 깜냥도 모르고 설치다 일을 그르친다. 역량은 있으되 그것을 펼 기회를 만나지 못한 이에게 동기를 부여해줄 때 뜻밖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새그물은 중간에 쳐라. 하지만 그 중간이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가 그 사람인 줄을 알아보는 안목이 없다면 이 또한 하나마나 한 소리다.
P214
심자양등(深者兩等) 깊이에도 차원이 있다
심침은 묵직한 무게감에서 오는 깊이다. 간심은 간악한 마음을 감추려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음험함이다. 한 사람은 어눌한 듯 자신을 지키고 한 사람은 입을 닫아 자기 깐을 따로 둔다. 이쪽은 분명한 자기 주견이 있어도 남을 포용하는 도량이 있다. 저쪽은 매순간 눈빛을 번득이며 무심코 뱉는 한마디 말로도 남을 찌른다.
속 깊은 것과 의뭉한 것은 다르다. 자신을 낮추느라 생긴 깊이와, 틈을 엿보려 만든 깊이가 같을 수 없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이 둘의 구분이 흐려진다. 그리하여 간악한 자가 속내를 숨겨 대인군자 행세를 하고, 상대의 묵직한 깊이를 무능함으로 매도해 이용하고 업신여긴다. 심침과 간심! 이 둘을 잘 분간해 그에 걸맞은 대접을 해주는 사회라야 건강한 사회다. 가짜들이 설쳐대면 희망이 없다.
P216
축장요곡(築墻繞曲) 수레가 들어올 수 없는 담장
윤원형의 첩 정난정은 당시 본처를 독살하고 정실 자리를 차지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첩이 정실로 들어앉아 행세해도 사람들은 그 위세에 눌려 아무 소리도 못했다.
정난정의 친오라비에 정담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제 동생이 하는 짓을 보면서 반드시 큰 재앙을 입게 될 줄을 미리 알았다. 그는 여동생을 멀리했다. 왕래를 간청해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사는 집의 문 안쪽에 일부러 담장을 구불구불하게 쌓아 가마를 타고는 도저히 출입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이 때문에 정난정이 오라비를 찾아가 볼 수도 없었다. 드러내놓고 거절한 것은 아니지만 거부하는 서슬이 사뭇 매서웠다.
P225
의관구체(衣冠狗彘) 옷을 잘 차려입은 개돼지
"선비가 염치를 알지 못하면 옷 입고 갓 쓴 개돼지다"
사람이 식견이 없어 고금의 이치에 무지해, 되는대로 처신하고 편한 대로 움직이면 멀끔하게 잘 차려입어도 마소와 다를 것이 없다. 염치를 모르는 인간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다. 개돼지에게 갓 씌우고 옷을 해 입힌 꼴이다. 염치를 모르면 못하는 짓이 없다. 앉을 자리 안 앉을 자리를 가릴 줄 모르게 된다. 아무데서나 꼬리를 흔들고, 어디에나 주둥이를 박아댄다.
제 몸가짐이 제아무리 반듯해도 세상에 보탬이 될 수 없다면 그것조차 쓸모없다고 했다. 그것은 무능한 것이다. 벼슬 욕심은 버릴 생각이 조금도 없고 재물의 이익도 놓칠 수가 없다. 자리만 차고 앉아 세상에는 보탬이 안 되고 제게 보탬이 될 궁리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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