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2009년 11월 11일 창덕궁 옥류천 탐방

한 용 석 2009. 11. 12. 12:42

탐방일자 : 2009년 11월 11일

 

탐방코스 : 돈화문 - 진선문 - 숙정문 - 어차고 - 동궁터 - 부용지 - 의두합 -  불로문 - 애련지 - 관람정 -  옥류천 - 금호문 - 돈화문

 

탐방시간 : 13:00 ~ 15:40 ( 약 3km정도)

 

교통편 :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출구

 

관람안내 : 4~11월 하루 3회 예약관람(인터넷 40명, 현장판매 10명 /50명) - 5,000원 , 매주 월 휴관, 목요일 자유관람(15,000원)

 

 

 

창덕궁(사적 122호 /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경복궁을 조선의 정궁(正宮)이라 하면 창덕궁은 이궁(離宮)에 해당한다. 창경궁도 마찬가지. 태종(1367~1422. 재위 1400~1418)은 아버지

태조가 창건한 경복궁이 도성의 중심에 있지 않고 삼각산의 주맥에서 벗어났다는 인식에서 창덕궁을 짓고 이궁으로 삼았다.

그 뒤로 역대 임금님들도 창덕궁을 좋아하여,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왕궁이 다 불타버렸을 때도 경복궁을 다시 짓기보다는 창덕궁을 먼저

다시 짓고 머문다. 순종도 아버지 고종이 중건한 경복궁을 떠나 창덕궁에서 대한제국의 말엽을 겪는다.

태종은 도성 건설에 아주 적극적인 분이었다. 태조의 한양 천도는 신도시의 개척과 마련이었으나, 태조가 기반을 이루었을 뿐인 도성을 서울

답게 건설한 분은 태종이다. 태종은 건설 담당 책임자인 박자청의 혼신의 노력에 힘입어 오늘날의 청계천 개천 정비사업과 함께 도로망을

설정하고 도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어 종로통을 위시한 주요지역에 행랑이라는 주상복합건물 1천여 간을 지어 도성을 번듯하게 만들고,

조선의 상권을 서울에 집중시켜 도성 발전의 기틀을 이룩하였다.

태종은 행랑을 돈화문(창덕궁 정문. 보물 제383호) 앞에서부터 시작하게 하였다. 태종 12년(1412)5월에 그 행랑 472간이 완성되자 의정부의

요청에 따라 돈화문 앞부터 각급 관청에 나누어주어 관아 건물로 활용할 수 있게 하니 소속 관원들이 궁 가까이에서 근무할 수 있는 조방이

조성되었다. 또 행랑의 일부를 개조하여 물화를 저축할 창고를 만들었다.

이는 결국 경복궁보다 청덕궁에 더 비중을 둔 정책으로, 창덕궁에 행정과 경제력이 집중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후대의 여러 임금님이

창덕궁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까닭도 이런 기반이 창덕궁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데 그 까닭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동궐이 종묘에 가까운 자리에 있다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경복궁에서는 임금님이 종묘로 납시는 거동 등이 번거로우나 동궐에서는

작은 문을 통하여 오고 가기가 아주 수월하였다. 봉제사를 주요시하던 시절에 이 점은 아주 유리한 여건이 되었다.

창덕궁에 임금님이 임어할 때 아버님과 할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홀로 남은 대비나 왕대비가 같은 궁에 함께 계시면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있으나, 그 어른들이 옮겨가 이웃 창경궁에 사시면 임금님의 처신은 한결  쉬워진다. 이런 점에서도 역대 임금님들이 동궐에 살기를 좋아

하셨을 것 같다.    - 신영훈 선생의 한국의 고궁 중에서..

 

창덕궁 후원

태종이 창덕궁을 창건할 당시 조성한 후원은 나중에 창덕궁과 창경궁 두 궁궐의 공동후원이 되었다. 이들 궁궐이 다른 궁궐보다 특히 왕실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은 넓고 아름다운 후원때문일 것이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고 후원이 훼손되어 광해군이 창덕궁과 함께

광해2년(1610)년에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인조, 숙종, 정조, 순조 등 여러 왕들이 개수하고 증축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창덕궁 후원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골짜기마다 인공적인 정원을 만들었다. 4개의 골짜기에는 부용지, 애련지, 관람지, 옥류천

정원이 펼쳐진다. 4개의 정원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크고 개방된 곳에서 작고 은밀한 곳으로 인공적인 곳에서 자연적은 곳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며 뒷산 응봉으로 이어진다. 서쪽 깊숙한 숲 속에 조성한 서원은 대보단이나 선원전 같은 제사 시설이 있는 신성한 곳이다.

세계 대부분의 궁궐 정원은 보고 즐기기 위한 관람용이어서 한눈에 볼 수 있는 장대한 졍관이 펼쳐진다. 이에 비해 창덕궁 후원은 작은

연못과 정자를 찾아 여러 능선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온몸으로 처험해야 진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창덕궁 후원에는 특별히 붙여진 고유한 이름이 없다. 한국의 전통 정원은 건물의 앞을 비워 두고 뒤편에 만들었다. 창덕궁도 그 예를 따라

궁궐 뒷편에 정원을 만들고 '후원(後苑)'이라 불렀다. 궁궐안에 있다 하여 '내원(內苑)',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어서 '금원(禁苑)'

이라 부르기도 했다. 또한 후원을 관리하던 관청의 이름을 따서 '상림원(上林苑)'이라고도 했다. 구한말에 궁 내부 관제를 개정하면서 후원

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비원(秘苑)'이라는 명칭이 기록에 등장한다. 비원이란 명칭이 일반인에게 익숙해진 것은 금원이었던 이곳을 일제가

의도적으로 일반인에게 공개하면서부터일 것이다. 오늘날에도 창덕궁 후원이 비원으로 불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바로 이때문이다.

 

돈화문(보물 제383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1412년(태종12)에 건림되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종묘 서쪽으로 낼

수밖에 없었으므로, 돈화문 역시 궁궐의 서쪽에 치우쳐 세웠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

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다. 그런데 이 월대는 일제 초기에 고관들이 자동차를 타고 창덕궁을 드나들면서 도로에 파묻히고

말았다. 1997년에 와서야 아스팔트를 걷어 내고 월대 부분을 되살렸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돈화문은 임진왜란 때 전소 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1606년

에 재건되었다. 

 

 

 

돈화문 추녀마루의 잡상

궁궐의 지붕 추녀마루 끝에 한 줄로 놓여있는 상으로, 궁 안에 잡귀나 흉액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잡상은 중국 소설 서유기의 주인공과 도교의 잡신으로 구성되는데, 대당사부, 손행자, 저팔계, 사화상, 이귀박, 이구룡, 마화상, 삼살보살, 천산갑, 나토두가 있다. 건물의 격에 따라 올려지는 잡상의 수가 다른데 3, 5, 7, 9, 11의 홀수로 올려진다. 
 

돈화문 바깥으로 길게 뻗은 기단 끝에 설치된 계단의 소맷돌

 

금천교와 진선문

금천교

태종11년(1411)에 가설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왕궁 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다.

진선문

금천교를 지나면 진선문이 있다. 태종2년(1402) 이 문에 신문고를 설치하였으나 중간에 유명무실해졌다가 영조4년(1771)에 다시 설치하였다.

<경국대전>에는 '원통하고 억울함을 호소할 자는 소장을 내되, 그래도 억울하다면 신문고를 두드려라' 라고 신문고 치는 절차를 밝혀 놓았다

일반 백성들이 이러한 절차를 다 밟기도 어려웠거니와,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돈화문을 통과하여 신문고를 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

을 것이다. 따라서 두드리기 힘든 신문고는 포기하고 왕의 행차에 뛰어들어 어려움을 호소하는 백성들이 많아져 조정의 골칫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왼쪽의 인정문과 정면으로 보이는 숙정문

 

인정문

 

숙정문 처마밑의 그물망 /새들의 배설물로 목재가 부식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옛부터 처마밑에 저런 그물망을 씌웠다고 합니다.

 

어차고

 

희정당

 

동궁터

 

동궁터를 지나 후원으로 들어서는 길목

 

 

후원의 단풍

 

부용지

이 일대는 왕실 자손들에게도 아주 요긴한 곳이었으며, 이 일대의 기운을 얻고 조상님의 보우를 받아야 비로소 임금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수련의 도량이기 하였다. 네모난 방지(方池)가 상징하는 땅의 기운이 둥근 섬의 천원(天圓)을 관일(貫日)하면 우주의 기운이 되니(天圓地方)

주합(宙合)에 이른다.

결국 역대 임금님들 어진을 봉안한 후 주합루에서 인격을 함양하면 천지의 기운을 얻어 임금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에서 이 일대는 자기 수양과 정진을 거쳐 임금의 자격을 인정받는 기품의 수련장이기도 하였다.

정조 원년(1777)에 주합루도 규장각과 함께 완성된다. 정조는 학문적인 소양이 아주 뛰어난 분으로 칭송받았으며, 실학파 학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둔 분이다. 그 어른의 놀라운 식견 덕분에 이 일대는 이만한 도량으로 발상되고 표상되었다.

 

주합루와 어수문

어수문은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 는 격언과 같이 통치자는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긴 문으로, 정조의 민본정치 철학을

보여 준다. 큰문 하나와 양쪽의 작은문 두개로 큰문은 왕이 드나들고 양쪽의 작은문은 신하들이 출입하는 문으로 항상 고개를 숙이고 겸손한

마음으로 임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1층은 규장각으로 국왕들의 시문, 친필 서화, 고명, 유교, 선보 등을 관리하고 임금님이 매일 다스리는 국정의 모든 것을 기록하여<일성록>

등의 일기를 편찬해 만권서적을 보관하는 기능이 부여되었다.

규장각에서는 따로 학식 높은 신하들과 더불어 정사를 토론하고, 백성들의 질고를 살펴 대책을 수립하고 타락한 풍습을 바로 잡아 순화하는

방도를 논의하는 등, 문교와 교화의 실천에 주력하였다. 규장각의 위층 다락이 주합루이다.

 

 

어수문 소맷돌

 

부용지에 물을 공급하는 용

연못으로 공급되는 물의 주입구가 용의 얼굴 모습이다.

 

 

부용정

물과 땅을 음과 양으로 상징하면 부용정은 음양을 합일하고 있는 형용이며, 음과 양의 합일은 왕실에서 크게 장려하는 대조의 기틀이다.

그래서 부용정의 평면은 十자형이다. 부용정이 대조하는 힘을 간직하려면 '알'을 품어야 한다. 부용정은 십十의 뒤편에 알을 품는 알집으로

반 간의 변화를 추구하였다.

 

영화당

영화당은 일대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현재 건물은 숙종 18년(1692년)에 재건한 것이다.
왕족의 휴식공간이자 이 건물의 앞마당인 춘당대에서는 친히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인재 등용을 위한 과거를 실시하였다.

영화당 현판은 영조의 어필이다. 
 

기오헌과 의두합

영화당에서 불로문을 향해 가다가 금마문으로 들어서기 전 언덕 위에 낮은 담장이 있고 작은 일각문이 보인다. 그 문으로 기오헌에 들어서던

것이나 지금은 다니기 어렵게 생겼다. 현재는 금마문을 향해 가다가 애련정 건너편에 북향하고 있는 기오헌을 만난다.

 

기오헌

기오헌과 의두합은 효명세자가 지은 건물로 단청을 칠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이다.
효명세자는 아버지인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를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이때 본보기가 되는

사람이 할아버지인 정조였으므로 주합루 뒤쪽에 집을 짓고 이곳을 나라 일을 생각하는 장소로 삼았다.
효명세자는 1830년 대리청정 3년 만에 22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후에 익종(翼宗)으로 추존되었다. 
 

의두합

기오헌 서쪽으로 넓지 않으 마당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자리잡았다.

 

불로문

불로문은 하나의 통돌을 깎아 세운 문으로 임금이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문의 위아래 양쪽 네귀퉁이에 있는 홈의 흔적

으로 보아 예전엔 문이 설치되었을 것을 추정된다. 

 

애련지와 애련정

숙종18년(1692)에 연못 속에 섬을 만들고 정자를 지어 애련정이라 하였다. 정자 동쪽에 돌로 만든 문이 있어 불로문이라 하며 정자 남쪽에

옛날에 함벽정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고 그 터만 남아있다.

연꽃을 특히 좋아하는 숙종이 이 정자에 '애련(愛蓮)'이라는 이름을 붙여 애련지가 되었다. 숙종은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

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새 정자의 이름을 지은 까닭을 밝혀 놓았다.

 

 

승재정

 

관람정

관람정은 닻줄 즉 배 띄움을 구경한다는 뜻이다. 관람정의 평면은 부채꼴 모양으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태의 정자이다.
관람정 앞 연못은 대한제국 말기나 일제 초기에 현재와 같이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예전엔 반도지라 불렀지만 지금은 이름없는 연못이다.

 

폄우사 

폄우사는 순조의 세자 효명세자가 독서하던 곳이다. '砭愚'란 어리석음을 경계하여 고쳐준다는 뜻이다. 

팔자걸음의 발자국모양처럼 바닥에 깔린 박석위를 밞아보는 사람들
 

존덕정

존덕정(1644년 건립)은 육각정자 형태로 겹지붕이 특이하다.

내부에는 '萬川明月主人翁自序'라는 정조의 글이 새겨진 현판이 걸려있는데 정조가 집권 말기인 1789년에 직접 지은 글이다.

“세상의 모든 시내는 달을 품고 있지만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유일하니, 그 달은 곧 임금인 나이고 시내는 고 너희 신하들이다. 따라서 시내가

달을 따르는 것이 우주의 이치”라는 강력한 내용이다. 평생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정조의 준엄한 꾸짓음을 듣는 듯하다.

 

존덕정 천장 중앙의 쌍룡그림

천장 중앙에는 쌍룡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 역시 왕권의 지엄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관람정

 

 

연경당 옆길

 

 

 

 

취한정

 

소요정

 

옥류천

옥류천은 창덕궁 후원 북쪽 깊숙한 곳에 흐르는 개울을 가리킨다. 인조 14년(1636년)에 커다란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 둥근 홈을 만들어 옥과

같이 맑은 물이 바위 둘레를 돌아 폭포처럼 떨어지게 만들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여기에 둘러앉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었다. 
 

소요암

소요암에는 인조의 玉流川이라는 어필 위에 숙종의 오언절구시가 새겨져 있다.
飛流三百尺 폭포는 삼백척인데
遙落九天來 멀리 구천에서 내리네
看是白虹起 보고 있으면 흰 무지개 일고
飜成萬壑雷 골짜기마다 우뢰소리 가득하네  

 

청의정

 

태극정

 

소요정

 

 

농산정

 

농산정 뒤쪽의 굴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