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도

남한산성도립공원

한 용 석 2008. 10. 29. 13:48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 북한산성()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에 축성()하였다.

《남한지()》에 따르면, 원래 심기원()이 축성을 맡았으나 그의 부친상으로 인하여 이서()가 총융사(使)가 되어 공사를 시작하여, 1626년 7월에 끝마쳤다. 공사의 부역()은 주로 승려가 맡아 하였다. 성가퀴는 1,700첩()이고, 4문()과 8암문()이 있으며 성안에는 관아()와 창고 등, 국가의 유사시에 대비하여 모든 시설을 갖추었고, 7개의 절까지 세웠다. 다만 성의 둘레가 6,297보(), 성가퀴는 1,897보라고 하는 등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러한 시설은 기본적인 것에 불과하였고, 인조 때부터 순조 때에 이르기까지 성내의 시설 확장은 계속되었다. 임금이 거처할 행궁()은 상궐() 73간() 반, 하궐() 154간이었다. 재덕당()은 1688년(숙종 l4)에 세웠고, 1711년에는 종묘를 모실 좌전(殿)을 세웠다. 그리고 사직단()을 옮길 우실()도 세웠다. 1624년에 건립된 객관(:)은 1829년(순조 29)에 수리되었다.

관아로는 좌승당()·일장각(수어청()·제승헌() 등이, 군사기관으로는 비장청()·교련관청()·기패관청() 등을 비롯한 20여 시설과 더불어 종각()·마랑()·뇌옥(),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묘(), 서낭당·여단(厲) 등이 들어서고, 승도청()을 두어 승군()을 총괄하였다. 당시에 나라를 지키는 성군()으로서의 불도()의 힘은 대단히 컸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산성의 축성에도 승려 각성()이 도총섭()이 되어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고, 이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전부터 있던 망월사()·옥정사() 외에 개원()·한흥()·국청()·장경()·천주()·동림()·동단()의 7사()가 창건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장경사만이 남아 있다.

남한산성의 수비는 처음에는 총융청에서 맡았다가 성이 완성되자 수어청이 따로 설치되었고, 여기에는 전()·좌·중·우·후의 5영()이 소속되었는데, 전영장()은 남장대()에,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진()을 쳤다. 현재는 서장대(라고도 함) 하나만이 남아 있다. 장대는 높은 섬돌 위에 2층으로 지었는데, 아래층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지붕은 팔작()이며 겹처마에 위층은 판문()으로 막았으나 아래층은 틔어 있다. 성문은 홍예문() 위에 성가퀴를 두르고 단층() 문루()를 올려 세웠는데, 매우 당당하고 위엄이 있다.

 

수어사(使) 이시백()이 축성 뒤에 처음으로 유사시에 대비할 기동훈련의 실시를 건의하여, 1636년(인조 14)에 1만 2,700명을 동원하여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막상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러 가지 여건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성문을 열어 화의()하고 말았다. 결국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들여서 쌓은 성이었으나 제구실을 하지 못한 뼈아픈 역사()였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의 성터였다고도 한다.

 

(출처 : 네이버테마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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