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서울성곽 걷기(성북동 초입~말바위쉼터 입구)

한 용 석 2008. 9. 1. 17:43

 

성북동 서울 돈가스 앞 서울성곽 초입구간

 

서울성곽에서 바라본 서울야경

 

 

서울성곽 말바위쉼터 가는길

 

1392년 개성 수창궁에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 지 한 달도 못 되어 한양천도 계획을 명하고, 태조 4년(1395)

경복궁, 종묘, 사직단의 건립이 완성되지 곧바로 정도전이 수립한 도성축조 계획에 따라 서울성곽을 수축하기 시작하였다.

평지는 토성, 산지는 석성으로 계획되었다. 이 방대하고 시급한 사업을 농한기에 완성하기 위하여 이듬해인 1396년 1,2월의

49일동안 전국에서 11만 8천명을 동원하여 성곽의 대부분을 완공하였고, 4대문과 4소문을 준공하였다.

그 후 27년이 지나 세종은 서울성곽을 전면 석성으로 수축하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 사업을 벌여 세종 4년(1422)1월 겨울

농한기에 전국에서 약 32만명의 인부와 2200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완공하였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약 10만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공사였고, 사망자만 872명에 달했다. 이것이 지금 서울성곽의 골격이다.

이후 서울성곽을 재정비 했던 숙종 30년(1704)까지 260년간 서울성곽은 부분적인 보수만 있었을 뿐 큰 붕괴는 없었다.

본래 서울성곽은 도성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았지만 정작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서울성곽은 큰 전란에서는 제구실을 할 수 없어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전란으로 인한 큰 피해는 없었다.

임진왜란의 경험을 토대로 인조는 서울 성곽과는 별도로 전쟁에 대비하여 남한산성과 강도성(강화도산성)을 수축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삼전도 맹약 중에는 조선은 앞으로 기존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성곽을 쌓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서 서울성곽은 방치된 상태로 놓아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1704년 숙종은 일부 산하들이 청나라와의 조약을 들어 반대하는 것을 물리치고 서울성곽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나아가

북한산성까지 쌓으며 도성의 방어체제를 정비하였다. 이것이 근대 사회로 들어오면서 의도록적으로 헐어내기 이전의 서울성곽이다.

이후 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 전차를 부설하면서 동대문과 서대문 부근의 성곽 일부가 혈려 나갔고, 이듬해는 용산과 종로 사이

전차부설을 위해 남대문 부근을 철거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서대문과 혜화문(동소문)이 헐리며 사실상 서울의 평지성곽은

모두 철거되어 오늘날에는 총 길이 18.2km 중 산지성곽10.5km만 남게 되었다.

2006년 문화제청과 서울특별시는 서울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하여 서울 성곽을 가능한 한 옛 모습으로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그 정비사업을 진행 중에 있다. 

 

 서울성곽에서 보이는 서울야경(동대문 운동장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