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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블린의 최후
침팬지의 ‘보안관 행동’
드 발은 라윗이라는 이름을 붙인 아른혐 동물원 알파 메일 침팬지의 행동을 면밀히 관찰했다. 라윗의 행동은 우두머리가 되기 전과 후가 확연하게 달랐다. 알파가 되기 전에는 다른 개체들의 다툼에 개입할 때 35퍼센트 정도만 약자 편을 들었는데 알파가 된 직후에는 그 비율이 69퍼센트가 되었고 나중에는 86퍼센트까지 올라갔다. 드 발은 알파 메일 침팬지의 보안관 행동이 의무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다. 약자인 암컷과 어린 침팬지를 지켜주지 않은 알파 메일은 도전자와 싸울 때 무리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드 발은 『차이에 관한 생각』에서 미국 영장류 연구소의 알파 메일 침팬지 아모스와 탄자니아 곰베 국립공원 알파 메일 침팬지 고블린을 비교했다. 아모스는 여러 장기에 악성 종양이 생겼는데도 마지막까지 건강한 것처럼 행동했다. 아모스가 쓰러지자 무리의 침팬지들이 앓아 누운 아모스를 보살펴 주었다. 아모스가 죽자 침팬지들은 며칠동안 밥을 잘 먹지 않았고 떠들지도 않았다. 아모스는 인기있는 수컷이었다. 관대하고 공평했다. 무리를 지배했고 경쟁자의 도전을 단호하게 물리쳤다. 그러나 다른 침팬지를 괴롭히지도 않았고 약자를 보호했다. 싸움을 말렸고 아픈 동료를 도왔다.
고블린은 반대 유형이었다. 둘 다 될 수 없다면 사랑받기보다는 남들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는 편이 낫다고 믿는 ‘마키아벨리적 무뢰한’이었다. 고블린은 무리를 공포에 떨게 하고 충성과 복종을 요구했다. 신체적 위해를 가할 것처럼 위협하는 방법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어느 날 젊은 도전자가 나타나자 무리가 기다렸던 것처럼 달려들어 고블린의 손발과 고환을 물어뜯었다. 고블린은 죽음을 면했으나 권력을 잃고 비참한 여생을 보냈다.
정치학이나 역사학 이론에 따르면 국가권력을 사유화해 정치적 경쟁자를 공격하고 언론의 자유를 탄압한 권력자는 민중의 신임을 잃고 몰락한다. 하지만 인문학 이론은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상대성이론처럼 확고한 진리가 아니다. 그것만 믿고 안심하기에는 부족하다. 생물학의 법칙도 물리법칙에 비하면 확실성이 덜하다. 하지만 인문학보다는 낫다. 대결 노선을 밀고 나가면 윤석열은 틀림없이 고블린과 같은 결말은 맞는다. 언제 어떤 계기 어떤 양상으로 그 시간이 찾아 들지 모를 뿐이다.
아모스와 고블린의 권력 상실 과정과 상실 이후의 삶을 결정한 것은 인간의 윤리 도덕이 아니라 알파 메일에게 보안관 행동을 기대하는 침팬지 무리의 생물학적 본능이었다. 권력과 관련하여 인간이 형성한 윤리 도덕은 호모 사피엔스와 침팬지가 공유한 본능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 본능의 유전자는 두 종의 조상이 갈라진 6백만년 전에 이미 자연에 존재하고 있었다.
P31
사악하고 영리한 권력자는 위기에 봉착하면 위선을 떨며 타협하기도 하지만 어리석은 권력자는 그마저 못한다.
P32
윤석열은 경청하지 않는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나 기시다 일본 총리를 만날 때를 빼고는 모든 곳에서 발언 시간을 독차지한다. 게다가 툭하면 ‘격노’한다. 격노는 비속함의 표현이다. 사악한 사람은 화가 나도 드러내지 않는다. 상대방을 방심하게 만든다. 조용히 타격을 가하고 손을 봐준다. 어느 유명한 ‘친윤’ 신문의 ‘친윤’ 언론인이 쓴 칼럼을 처음에는 믿지를 않았다. 59분 대통령? 한 시간 회의하면 59분을 쓴다고? 설마! 영수회담 비공개 대화에 배석한 민주당 정치인들의 말을 들어보니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당 대표와 비공개 대담하면서 시간의 85퍼센트를 썼는데, 부하들하고 회의할 때는 오죽했겠는가. 명예훼손이라고 격노할지 몰라서 용핵관들은 75퍼센트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P33
부족함을 모르면 학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비속함을 인지하지 못하면 비속함을 극복할 수 없다. 모든 일을 현재 수준에서 판단하고 실행하면서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 그래서 그는 2년 넘게 대통령을 했는데도 실력이 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완성형 대통령’이다. 앞으로도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비속한 권력자한테는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어떤 참모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막아서지 못한다. 자칫하면 상상하기도 어려운 쌍욕을 듣는다.
P40
프레임은 ‘사건이나 사물을 대하는 인식의 구조’를 말한다. 조지 레이코프가 『코끼리는 생각하지마』(유나영 옮김, 와이즈베리, 2015)에서 널리 알린 개념이다. 조국 위선자 프레임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말로는 공정과 정의를 외쳤지만 뒤로는 입시비리를 저지르면서 자녀를 명문대학에 보낸 위선자였다.”
옳게 살려고 했으나 완벽하지 못했던 것은 위선이 아니다.
완벽한 선, 완전한 언행일치를 이루어야 위선자라는 비난을 면할 수 있다면, 누가 감히 사회적 악덕을 바로잡자고 나설 수 있겠는가. 인간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다. 모든 생명체가 지는 자기중심성을 완전히 벗어던질 수는 없다.
사람은 자신과 가족을 위한다. 그러면서도 세상을 더 낫게 하려고 남과 더불어 살려고 애쓴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는 것을 보수, 오로지 세상을 위하는 것을 진보라고 하자. 이것이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올바른 기준은 아니다. 유일한 기준은 더욱 아니다. 널리 쓰는 기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불완전한 진보를 공격하는 위선자 프레임이 타당한지 살펴보는 데 적합해서 선택했다. 사람은 자신을 위한 일과 세상을 위한 일을 모두 한다. 그러나 둘을 조합하는 비율과 일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어느 쪽에 더 큰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보수와 진보로 나뉜다.
보수는 정부의 새로운 정책에 대한 뉴스를 보면 자신에게 이익인지 여부를 먼저 생각한다. 진보는 그 정책이 옳은지 여부를 먼저 생각한다. 먼저 생각한다는 것이지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어느 쪽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
자기밖에 모르는 것 같은 사람이 남을 위해 세상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면 사람들은 칭찬한다. 보수도 칭찬하고 진보도 칭찬한다. 그런대 반대 경우는 그렇지 않다. 세상을 위해 사는 것 같았던 사람이 자신과 가족을 위해 무엇인가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모두가 비난한다. 보수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라 욕하고 진보는 당신이 그럴 줄 몰랐다며 분개한다. 윤석열은 이것을 노렸다.
완벽하게 훌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난받고 조롱당해야 한다면, 조금의 약점만 드러나도 기소되고 유죄판결을 받아야 한다면, 의도하지 않은 오류를 죽음으로 책임져야 한다면, 누가 감히 진보의 삶을 선택할 수 있겠는가. 정치검찰과 보수언론은 말했다. “완벽하게 선할 수 없다면,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한 톨 나지 않을 자신이 없다면, 수치와 불명예의 구렁텅이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고 싶지 않다면, 정의니 공정이니 평등이니 하는 말을 입에 올리지 말라. 노무현과 노회찬과 조국의 최후를 보았지 않았는가!”
위선조차 부리지 않는 악보다는 완벽하지 못한 선이 낫다고 판단했다. 2022년 3월 9일에 했던 것과 비슷한 판단 착오를 금방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완벽하지 않다. 어떤 면에서도 완전무결한 존재는 될 수 없다. 완벽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비난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움츠리지는 않는다. 불완전한 모습으로,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면서, 때로 길을 잃고 방황하면서, 자연이 준 본성에 따라 사회적 미덕과 선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내일의 세상을 오늘보다 무엇 하나라도 낫게 만드는 데 힘을 보태려 한다. 윤석열을 보면서 마음에 새긴다. 서로에 대한 불신과 불관용이 악의 지배를 연장한다는 것을. 부족한 그대로, 서로 다른 그대로 친구가 되어 불완전한 벗을 관대하게 대하면서 나아가야 악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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