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4
몽테뉴의 「수상록」. 누렇게 바랜 문고판을 다시 읽는다. 이런 구절. 늙어서 읽으니 새삼 좋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근심으로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삶에 대한 걱정 때문에 죽음을 망쳐버린다."
P19
가벼운 접촉사고가 발단이었다. 삼거리였고 놈의 지프가 내 앞에 있었다. 요즘은 맹목이 일상이다. 알츠하이머 때문이겠지. 나는 순간적으로 정차해 있는 놈의 차를 보지 못하고 그대로 추돌하고 말았다. (…) "이 동네 사시오?"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처음으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뱀의 눈이었다. 차갑고 냉혹했다. 나는 확신한다. 그때 우리 둘은 서로를 알아보았다. (…) 그 때 나는 보았다. 트렁크에서 점점이 떨어지는 핏방울을. 또한 나는 느꼈다. 뚝뚝 듣는 핏방울을 바라보는 나를 주시하는 그의 시선을.
P21
누구였더라? 스페인, 아니 아르헨티나 작가였나. 이젠 작가 이름 따윈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여간 누군가의 소설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노작가가 강변을 산책하다가 한 젊은이를 만나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나중에야 깨닫는다. 강변에서 만난 그 젊은이는 바로 자신이었음을. 만약 젊었을 때의 나를 그렇게 만나게 된다면 알아볼 수 있을까?
P22
은희 엄마가 내 마지막 제물이었다. 그녀를 땅에 묻고 돌아오던 길에 차가 나무를 들이받고 전복됐다. 경찰은 내가 과속을 하다 커브길에서 중심을 잃었다고 말했다. 두 번의 뇌 수술을 받았다. 처음에는 약 기운 탓이라 생각했다. 병실에 누워 있는데, 마음이 한없이 평안하여 기이했다. (…) 사고 때의 충격 때문이든 의사의 메스질 때문이든 내 뇌에서 뭔가가 일어났던 것이다.
P27
문화센터에 다닐 때, 강사가 미당의시를 가지고 수업을 했다. 「신부」라는 시였다. 첫날밤 뒷간에 가는 신랑의 옷이 문고리에 걸렸는데, 신랑은 신부가 음탕해서 그러는 줄 알고 달아났다가 40년인가 50년 후에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 들러보니, 신부가 첫날밤 모습 그대로 앉아 있더라는, 그래서 툭 건드렸더니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았더라는 얘기, 강사부터 수강생들까지 정말 아름다운 시라며 난리를 피웠었다.
나는 그 시를, 첫날밤에 신부를 살해하고 도주한 신랑 이야기로 읽었다.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 그리고 시체. 그걸 어떻게 달리 읽겠는가?
P30
아버지가 나의 창세기다. 술만 마시면 어머니와 영숙이를 두들겨패는 아버지를 내가 베게로 눌러 죽였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아버지의 몸을, 영숙이는 다리를 누르고 있었다. 영숙이 나이 고작 열셋이었다. 옆구리가 터진 베개에서 왕겨가 쏟아져나왔다. (…) 나는 열다섯 살에 쌀가마를 졌다. 고향에선 사내가 쌀가마를 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아버지라도 손을 못 댔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아버지에게 계속 맞았다. 어머니와 여동생의 옷을 모두 벗겨 엄동설한에 내쫓기도 했다. 죽이는 게 최선이었다. 다만 후회가 되는 것은, 혼자 할 수도 있었던 일에 어머니와 여동생을 연루시켰던거뿐이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아버지는 늘 악몽을 꿨다. 잠꼬대도 심했다. 죽는 순간에도 아마 나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쓰인 모든 글들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정신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리라. 타인의 피를 이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책 읽는 게으름뱅이들을 증오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이다.
P33
마지막으로 살인을 하던 해에 나는 마흔다섯이었다. 문득 짚어보니 베개에 숨이 막혀 죽던 때의 아버지 나이, 마흔다섯이었네. 이상한 우연이다. 이것도 적어둔다.
P34
거울을 보며 표정을 연습했다. 슬픈 표정, 밝은 표정, 걱정하는 표정, 낙담하는 표정. 그러다 간단한 요령을 익혔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의 표정을 그대로 흉내내는 것이다. 남이 찡그릴 때 찡그렸고 남이 웃을 때 웃었다.
옛사람들은 거울 속에 악마가 살고 있다고 믿었다지. 그들이 거울에서 보던 악마, 그게 바로 나일 것이다.
P37
시내에 나가 장을 보는데 은희가 일하는 연구소 앞에 낯익은 놈 하나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누군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다가 마주 지나가는 지프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놈이다. 나는 수첩을 꺼내 이름을 확인했다. 박주태였다. 놈이 은희 근처에 와 있다.
P39
선사시대 인류의 유골을 조사해보면 태반이 살해당한 것이라 한다. 두개골에 구멍이 뚫려 있거나 뼈가 예리한 것으로 잘려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연사는 드물었다. 치매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살아남기도 어려웠을 테지. 나는 선사시대에 속한 인간인데 엉뚱한 세상에 떨어져, 거기에서 너무 오래 살았다. 그 벌로 치매에 걸린 것이다.
P40
연쇄살인법도 해결할 수 없는 일: 여중생의 왕따.
P48
"우리는 모두 타인의 고통 속에서 태어나 자신의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
P57
"내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친구여." 차라투스트라가 대답했다. "당신이 말한 것 따위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악마도 없고, 지옥도 없다. 당신의 영혼이 당신의 육신보다 더 빨리 죽을 것이다. 그러니 더이상 두려워하지 마라."
마치 나 들으라고 써놓은 듯한 니체의 글.
*
살인자로 오래 살아서 나빴던 것 한가지: 마음을 터놓을 진정한 친구가 없다. 그런데 이런 친구, 다른 사람들에게는 정말 있는 건가?
P62
책을 읽는데 갈피에서 메모지가 툭 떨어진다. 오래전에 배껴 적은 것인지 종이가 누렇게 바랬다.
"혼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혼돈이 당신을 쳐다본다._니체"
P87
내 악마적 자아의 자율성을 제로로 수렴시키는 세계, 내게는 그곳이 감옥이고 징벌방이었다. 내가 아무나 죽여 파묻을 수 없는 곳, 감히 그런 상상조차 하지 못할 곳, 내 육체와 정신이 철저하게 파괴될 곳. 내 자아를 영원히 상실하게 될 곳.
P98
인간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치매에 걸린 인간은 벽이 좁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숨이 막힌다.
P101
이제 처음으로 은희는 가정다운 가정을 꾸릴 단꿈에 젖어 있다. 그런데 은희야. 상대가 왜 하필 그놈이란 말이냐. 왜 하필 네가 사랑하는 놈은 너의 부모를 죽인 내 손에 죽을 운명이란 말이냐.
P111
몇 년 전, 치과에 갔다가 몰입의 즐거움 어쩌고 하는 책이 있기에 대충 읽었다. 저자는 몰입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게 얼마나 큰 즐거움을 주는지에 대해 강조하고 있었다. 이보게, 저자 양반, 나 어릴때만 해도 아이가 하나에만 몰입하면 어른들이 걱정을 했다네. 애가 외골수라며, 그때는 오직 미친 사람들만 한 가지에 몰입을 했지. 오래전의 내가 사람을 죽이는 일에 골몰하며 얼마나 깊이 몰입했는지, 거기에서 얼마나 큰 즐거움을 얻었는지를 당신이 안다면, 몰입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안다면, 그 입을 다물 거야. 몰입은 위험한 거야. 그래서 즐거운 거고.(…) 다시 몰입하고 싶다.
P115
사람들은 악을 이해하고 싶어한다. 부질없는 바람. 악은 무지개같은 것이다. 다가간 만큼 물러나 있다. 이해할 수 없으니 악이지. 중세 유럽에선 후배위, 동성애도 죄악 아니었나.
P117
오디세우스는 귀환을 시작하자마자 연을 먹는 사람들의 섬에 기착한다. 사람들이 친절하게 권한 연 열매를 먹고 나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 고향은 과거에 속해 있지만 그곳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은 미래에 속한다. 그후로도 오디세우스는 거듭하여 망각과 싸운다. 세이렌의 노래로부터도 달아나고 그를 영원히 한곳에 붙들어두려는 칼립소로부터도 탈출한다. 세이렌과 칼립소가 원했던 것은 오디세우스가 미래를 잊고 현재에 못박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끝까지 망각과 싸우며 귀환을 도모했다. 왜냐하면 현재에만 머무른다는 것은 짐승의 삶으로 추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을 모두 잃는다면 더는 인간이랄 수가 없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가상의 접점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박주태를 죽이겠다는 나의 계획도 일종의 귀환이 되는 셈이다. 내가 떠나왔던 그 세계, 연쇄살인의 시대로 돌아가려는, 그리하여 과거의 나를 복원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P119
잠이 오지 않아 밖으로 나오니 밤하늘엔 별들이 찬란하다. 다음 생애는 천문학자나 등대지기로 태어나고 싶다. 돌이켜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를 상대하는 일이 제일 힘들었다.
P128
오이디푸스는 길을 가다 홧김에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 나라에 역병이 창궐하자 왕이 된 그는 신들을 분노케 한 범인을 찾아내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채 하루도 지나기 전에 그 범인이 자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순간 그가 느낀 것은 수치였을까, 죄책감이었을까, 어머니와 동침한 것은 수치요, 아버지를 죽인 것은 죄책감이었겠지.
오이디푸스가 거울을 보면 내 모습이 거기 있을 것이다. 닮았지만 좌우가 뒤집혀 있다. 그는 나와 같은 살인자였지만 자기가 죽인 사람이 아버지인지도 몰랐고 나중에 그 행위마저도 잊어버렸다. 그러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자각하면서 자멸한다. 나는 처음부터 내가 아버지를 죽인다는 것을, 죽이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후에 잊은 적도 없다. 나머지 살인들은 첫 살인의 후렴구였다. 손에 피를 묻힐 때마다 첫 살인의 그림자를 의식했다. 그러나 인생의 종막에 나는 내가 저지른 모든 악행을 잊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를 용서할 필요도, 능력도 없는 자가 된다. 절름발이 오이디푸스는 늙어서 비로소 깨달은 인간, 성숙한 인간이 되지만 나는 어린아이가 된다. 아무도 책임을 물울 수 없는 유령으로 남으리라.
오이디푸스는 무지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파멸로 진행했다. 나는 정확히 그 반대다. 파멸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무지로, 순수한 무지의 상태로 이행할 것이다.
P145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악이 아니오. 그냥 기도나 하시오. 악이 당신을 비켜갈 수 있도록."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P146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맴도는 시구 하나. 강변의 하루살이 떼처럼 집요하게 들러붙어 떨쳐낼 수 없다. 일본의 어느 사형수가 지었다는 하이쿠 한 수.
나머지
노래는
내세에서 들이리.
어이.
P148
미지근한 물속을 둥둥 부유하고 있다. 고요하고 안온하다.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공空 속으로 미풍이 불어온다. 나는 거기에서 한없이 헤엄을 친다. 아무리 헤엄을 쳐도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다. 소리도 진동도 없는 이 세계가 점점 작아진다. 한없이 작아진다. 그리하여 하나의 점이 된다. 우주의 먼지가 된다. 아니 그것조차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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