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마음을 놓다 - 이주은
[욕조] 바네사 벨(1879~1961)
P013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에의하며, 물에 들어가는 것은 존재하기 이전의 미분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런 상징성 때문에 물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신성하게 여겨졌다. 물을 이용한 의식은 비록 각 지역의 문화와 종교에 흡수되기는 해도, 결코 그 맥이 끊기는 일이 없었다. 가령 몸을 물에 담그는 세례는 육신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의미를 지닌 의식이다. 그런가 하면 인도의 힌두교도들은 겐지스 강물에 몸을 담그는 의식을 통해 병이 치유되고 영혼이 자유로움을 얻으리라고 믿는다.
벨의 그림에서도 여인이 들어가려고 하는 욕조는 양수로 가득 찬 둥그런 어머니의 자궁인지도 모른다. 목욕은 물을 통해 몸과 마음의 더러움과 슬픔을 녹여버리고 깨끗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침수의 체험을 하는 것이다. 소멸과 재생, 그것이 바로 목욕을 통한 회복의 진정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P021
스피노자가 말하는 인간의 굴레란 한마디로 인간이 감정의 노예가 되는 것을 뜻한다.
스피노자는 감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을 이성의 통제력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이성의 힘만으로 어떻게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를 막겠는가. 격정이 오기도 전에 미리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또 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는가. 사랑의 감정은 늘 세상 저 너머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예고도 없이 괴물처럼 갑작스레 뒤통수를 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때로 그것은 너무도 광포해서 곁에 있을 때에는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고, 오직 나중에 휩쓸고 지나간 상흔만을 볼 뿐이다.
P023
사람은 자기 자신을 더 잘 보기 위해서 타인의 눈을 필요로 하고, 나 자신의 욕망을 더 잘 느끼기 위해서 타인의 촉감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감정이란 막고 통제하려고 하면 굴레가 되지만, 느끼고 만끽하려고 하면 자신을 더 잘 알게 하는 마술의 틀이 되는 것이다.
[입맞춤] 오귀스트 로댕
P026
에이젠슈테인이 제작한 무성영화 '10월'에는 로댕의 '입맞춤'이 단 한 컷, 그러나 매우 강렬한 의미를 지니고 등장한다. 영화는 러시아 10월 혁명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겨울궁전을 점령하여 사수하고있던 혁명군들의 눈에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입맞춤'이 들어온다. 부드럽게 얽혀 있는 하얀 두 육체가 여군들의 손에 쥐어진 검은 장총과 예리한 대조를 이룬다. '입맞춤'을 바라보면서 이념으로 무장했던 여군들의 마음은 눈 녹듯 수그러든다. 그리고 그토록 혐오하던, 가진 자의 사치이자 환상일 뿐이라고 외쳐대던 사랑의 감정을 자신들도 모르게 애타게 갈망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듯 사랑은 이성의 작동을 중단시켜버릴 때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과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P029
독일의 연극이론가 브레히트는 관객들이 연극배우들에게 완전히 감정이입을 하지 말고 무대의 사건을 생소한 듯 거리를 두고 감상할 것을 권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성을 개입시키고 판단력을 작동시켜 연극을 보라는 견지에서였다. 사랑하는 사이도 가끔은 거리를 두고 서로를 낯설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본능이 이성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경계 없음의 경지는 아무나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세계를 소멸시켜 경계 없음에 도달하는 것은 하수이다. 자기영역을 굳건히 지키면서 경계를 넘어설 수 있어야 고수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