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_ 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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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지 않은 앞날을 누가 예측할 수 있겠는가.
앞날은 밀려오고 우리는 기억을 품고 새로운 시간 속으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기억이란 제 스스로 기억하고 싶은 대로 기억하는 속성까지 있다. 기억들이 불러일으킨 이미지가 우리 삶 속에 섞여있는 것이지, 누군가의 기억이나 나의 기억을 실제 있었던 일로 기필코 믿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고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면 나는 그 사람의 희망이 뒤섞여 있는 발언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그렇게 불완전한 게 기억이라 할지라도 어떤 기억 앞에서는 가만히 얼굴을 쓸어내리게 된다. 그 무엇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던 의식들이 그대로 되살아나는 기억일수록. 아침마다 눈을 뜨는 일이 왜 그렇게 힘겨웠는지,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은 왜 그리 또 두려웠는지, 그런데도 어떻게 그 벽들을 뚫고 우리가 만날 수 있었는지.
P28
엄마가 깻잎김치를 담그고 손가락의 반지를 빼서 종이에 감싸 내게 보낸 뒤에 이 세상을 떠난 것이라고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눈을 파낼 듯이 눈가를 문지르게 되곤 했다. 이제는 수요일이 되어도 받아올 약이 없는데, 나는 수요일 이른 오전시간이면 그 병원의 대기실에 가 앉아 있었다. 수요일의 습관이었다. 기다릴 숫자도 없는데 땡, 하는 신호음이 들리면 얼굴을 들어 전광판의 숫자가 바뀌는 것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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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저 얘기해……마음속에 남겨두지 말고.
―괜찮겠어?
―함께 싸워줄게.
―왜?
―우린 지금 함께 있으니까.
함께 공유하면 상처가 치유될까. 잊을 수는 없겠지만 그때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길. 바래진 상처를 딛고 다른 시간 속으로 한 발짝 나아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