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영초언니 - 서명숙

한 용 석 2017. 7. 26. 15:57

P53

 "유치환의 시 「깃발」처럼 명숙이 네가 남겨두고 간 빨래를 깨끗이 빨아서 마당 빨랫줄에 가지런히 널어놓고 보니 네가 너무나 보고 싶다. 네 빨래 펄럭이고 내 그리움도 펄럭이고……"

 

P55

 언니는 굼벵이나 지렁이 같은 벌레를 중앙정보부보다 더 무서워힜다. 나중에 누가 벌레로 고문하면 동지든 친척이든 죄다 술술 불어버릴 거라고 농담할 정도였다(훗날 이 비슷한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P73

영화 <오래된 정원>에는 장기수로 복역하다가 출소한 아빠가 자기 신분을 숨긴 채 딸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는 자기만 행복하면 웬지 나쁜 놈이 되는 시대였거든. 그래, 바고 같았던 거지……"

 

 당시 유행가의 한 대목처럼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우리는 늘 헛헛했고, 무력했고, 죄의식 비슷한 것에 시달렸다.

 

 1978년 봄, 교정에 핀 진달래는 더이상 단순한 꽃이 아니었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이라는 <진달래>의 가사처럼 핏빛 진달래는 이미 저세상으로 떠난 전태일 열사, 사전 검속으로 잡혀가서 다시는 학교로 돌아오지 못한 선배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은유적 상징이었다. 꽃이 더이상 꽃으로만 보이지 않는 세상은 끔찍했다.

 

P188

 면회를 마치고 돌아서는 그애의 구부정한 어깨가 노인네처럼 스산하고 쓸쓸해 보였다. 방으로 돌아온 내게 옥주는 바짝 다가와서 수다스럽게 질문공세를 폈다.

 "엄마지? 맞지? 뭐라 그러셔? 뭘 넣고 가신대?"

 난 고개를 무릎에 파묻고 한참을 울었다. 독재정원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만들어 대학가에 뿌린 죄가 이렇게 온 가족을 눈물의 강에 익사시키고 고통의 늪에 빠뜨리고 여드름투성이 고등학생을 인생 다 살아버린 늙은이로 만들어버릴 만큼 큰 것일까. 나는 결초 우리를 감옥에 보낸 이들을 용서하지 않겠노라고 입술을 깨물었다.

 

P207

 판결은 예상대로 '전원 유죄'였다. 천영초 징역 2년 6개월에 자격정지 2년 6개월, 서명숙, 박종원은 각각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 독재정권을 향해 독재정권이라고 말한 죄, 그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를 계획한 죄였다. 수배중인 조봉훈을 제외하면 연루자가 모두 여대생들이어서 실낱같은 기대를 품었던 방청객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사법부가 역사의 죄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