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학이(진화심리학이) 말하는(퍼뜨리는) 성차별이(젠더 불평등) 불편합니다 - 마리 루티 지음, 김명주 옮김
맺음말
P285
젠더 프로파일링이 해롭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고유한 본성 (그리고 역할)에 대한 진부한 가정들로 가득한 세계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잊어버림으로써 진정한 관계를 맺을 가능성 자체를 잃는다. 게다가 젠더 프로파일링이 성차별주의를 조장하지 않는다고 말해봤자 소용없다. 이분화된 양자 가운데 하나가 나머지 하나보다 우월하다고 암시하는 것이 이분법적 사고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젊은이 대 노인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이 이분법이 결백하지 않다는 사실 - 즉 우리가 열렬하게 '항노화'를 부르짖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은 동네 화장품 가게에 가서 스킨케어 코너만 둘러봐도 알 수 있다. 아니면 백인 대 흑인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흰색은 흰 눈의 순수함에서부터 신이 내뿜는 백색광채에 이르기까지 좋은 것을 연상시킨다. 반면 흑색은 악, 더러움, 불길함, 수치스러움, 악마와의 교접을 함축한다. 이러한 흑백 이분법의 인종차별주의적 함의는 너무나 명백하고, 이는 우리가 사고의 회색 지대를 인정하기 시작한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다. 이분법적 사고가 폭력적인 것은 그것이 세계를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기 위해 중간 지대를 모두 배체하기 때문이다. 이분법적 사고는 특이하고 비교가 불가능한 존재를 짓밟기 위해, 사람들을 두 개의 작은 상자에 깔끔하게 분리해 넣으려고 한다. 그리고 잘 맞지 않거나 맞출 수 없는 사람들을 무정하게 배제해, 부적절한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이런 식의 사고가 어떻게 우리를 도울 수 있을까? 이분법이 인생의 복잡한 문제들에 명료한 해답을 제공한다는 생각이 아무리 매력적이라 해도, 이러한 사고의 억압적인 잠류를 피하기란 불가능하다. 특히 젠더 이분법의 경우, 남성가 여성을 '다르게' 여길수록, 그들은 더 불평등해진다.
정치인들이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먹힌다는 심리를 조장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이분법적 논리에 기댄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라. 예를 들어 효과적인 군사 전략의 첫 번째 단계는 세계를 선과 악으로 나누고, 적이 후자임을 자신의 진여에 납득시키는 것이다. 적에 속하는 사람들은 우리 같은 품위 있고 문명화된 시민과는 공통점이 전혀 없는, 잔혹한 괴물로 그려진다. 그리고 적도 물론 우리와 똑같이, 우리를 영혼 없는 살인마로 묘사하기 위해 지나치게 노력한다. 전쟁이라는 틀 안에서 이분법적 사고가 하는 일은,'그들'과 우리 사이의 유사점을 더이상 보지 않음으로써 양심의 가책 없이 공격할 수 있는 적을 만들어내는 것, 윤리적 불편함을 없앨 수 있도록 도와 죄책감 없이 폭력을 휘두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P288
두 사람-남성 또는 여성, 이성애자 또는 동성애자, 아니면 그 중간-이 깊은 관계를 맺을 때마다 뿌연 회색 지대를 마주해야 함을 들여다보는 것이 우리에게 훨씬 더 이득일 것이다. 타인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사람 본인조차 자신을 투명하게 볼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이 품는 동기의 대다수가 무의식적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의 투명성을 타인에게 기대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타인과 윤리적인 관계를 맺는 능력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불투명하게 남아 있는 부분을 인내하는 문제일 것이다.
P291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고통의 가능성을 배제한 채 사랑하는 것은 결국 불가능하다. 상대방이 어느 정도는 항상 내 이해 능력 밖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확실히 내 통제 밖에 있기 때문에- 정서적 투자의 안전을 보증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이것은 재앙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위대한 설계의 비극적인 흠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위대한 설계의 비극적은 흠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이라는 탐험으로, 진정한 발견의 장소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보면, '성숙한' 사랑은 연애에서 환상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냉철한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타인의 현실을 결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것은 관계 맺기라는 양가성의 땅으로 용기 읶게 들어가는 문제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가 상대방을 다 알지 못하고 다 알 수 없음을 인정할 때, 변화의 여지가 생긴다. 성 고정관념을 포함한 경직된 선입견에 갇혀 상대방에 대해 넘겨짚는 것이 상대방의 변화를 가로막는다면, 선입견을 버리는 행위는 상대방에게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변화할 여지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