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p22
한 여인(비행기 조종사였다)은 나와 만나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전화로 거절 사유를 설명했다. "옛날 일을 떠올릴 수가 없어요. 생각조차 하기 싫어요……3년이나 전쟁터에 있었어요. 그 3년 동안 나는 여자가 아니었죠. 여자로서 내 몸은 죽어버렸어요. 생리도 끊기고 여성으로서의 욕구도 거의 없었으니까. 나는 꽤 예뻤어요……우리 남편이 나에게 청혼 했는데……베를린의 국회의사당 앞에서……그이가 청혼하면서 그러더군요. 전쟁은 끝났고, 우리는 살아남았다고, 우리는 억세게 운이 좋았다고. 자기랑 결혼자하고. 나는 엉엉 울고 싶었어요. 소리소리 지르고 그 사람을 두들겨패고 싶었어요. 결혼? 지금? 세상이 이렇게 끔찍하게 돌아가는데 결혼을 하자고? 세상이 온통 까맣게 타버리고 보이는 거라곤 시커먼 벽돌뿐이데, 결혼을 하자니……그래서 소리쳤어요. '나를 좀 봐요……지금 내 꼴을 좀 보라니까요! 먼저 나를 여자로 만들어줘요. 꽃도 선물하고, 데이트도 신청하고, 달콤한 말도 하란 말이에요.' 얼마나 해보고 싶은 일이었는데! 얼마나 꿈꾸던 일인데! 그이를 거의 때릴 뻔했어요……정말 그이를 때리고 싶었어요……그런데 그이의 한쪽 뺨에 눈물이 흐르는 거에요. 그때 그이는 얼굴에 화상을 입어 한쪽 뺨이 발갰는데, 그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어요. 아직 아물지 않은 발간 그 상처 위로. 그때 알았어요, 그이도 내 마음과 같다는 걸, 그러자 나도 모르게 대답이 나와버렸죠.'그래요, 우리 결혼해요'
미안해요. 더이상 못하겠어요……"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다……
도스토옙스키가 던진 물음.'사람은 자신 안에 또다른 자신을 몇 명이나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그 다른 자신을 어떻게 지켜낼까?'
p27
나는 딸아이와 함께 공원에 갈 준비를 했다. 회전목마를 타러. 여섯살 난 아이에게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할 수 있을까. 얼마 전 딸아이가 물었다."엄마, 전쟁이 뭐에요?" 아, 어떻게 대답하나……나는 우리 아이가 사랑으로 이 세상과 만나기를 바라며, 함부로 꽃을 꺾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무당벌레를 밟아 죽이거나 잠자리의 날개를 잡아 뜯는 건 잔인한 짓이라고. 그러면서 어떻게 이 아이에게 전쟁을 설명한단 말인가? 어떻게 죽음을 설명할 수 있을까? '거기선 왜 사람들을 죽이냐'는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줘야 할까? 우리 딸처럼 어린아이들까지 죽어나가는 그곳. 우리 어른들은 서로 공모라도 한 것 같다.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듣는다. 하지만 아이들은?
p28
"배낭을 배급받았는데 그걸로 치마를 해 입었지 뭐야." "모병사무소 문을 열고 들어갈 때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나올 때는 바지와 군복 차림으로 바뀐 거야. 긴 머리도 싹둑 잘라버려서 짧은 앞머리만 덩그러니 남고……"
여자들이 전쟁에 대해 아무리 이러니저러니 떠들어도, 기본적으로 여자들의 머릿속에는 '전쟁은 살인행위'라는 생각이 또렷이 박혀 있다.
여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죽음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혐오와 두려움이 감춰져 있다. 하지만 여자들이 그보다 더 견딜 수 없는, 원치 않는 일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여자는 생명을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선물하는 존재. 여자는 오랫동안 자신 안에 생명을 품고, 또 생명을 낳아 기른다. 나는 여자에게는 죽는 것보다 생명을 죽이는 일이 훨씬 더 가혹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p55
"나는 기관총 사수였어. 사람을 참 많이 죽였어……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은 아이를 낳기가 무서웟어. 그래서 어렵게 아이를 낳았는데, 낳고 나니까 괜찮아 지더라고. 그렇게 되기까지 7년이나 걸렸지만……
p83
또 무슨 일이 있었나……글쎄……전쟁이 몇 년 동안 있었지? 4년. 그래, 참 길기도 했네……그런데 그 4면 동안 꽃이고 새고 전혀 본 기억이 없어. 당연히 꽃도 피고 새도 울었을 텐데. 그래. 그래……참 이상한 일이지? 그런데 정말 전쟁영화에 색이 있을 수 있을까? 전쟁은 모든게 검은색이야. 오로지 피만 다를 뿐, 피만 붉은색이지……
p198
…내겐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많은 반면, 집사람에겐 전쟁에 대한 감정이 더 많아요. 하지만 언제나 감정이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강력한 법이지. 우리 보병 중에도 소녀병사들이 있었어요. 우리 중에 소녀병사가 한 명이라도 끼여 있으면 그만한 가치가 있었소. 당장 사기가 올라갔으니까.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요 …… 절대! 실은 이런 이야기도 우리 집사람한테서 슬쩍한 거지만. 전장에서 여자 웃음소리를 듣는 게. 여자 목소를 듣는 게 얼마나 좋은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걸.
p229
"우리 남편은 명예훈장 수훈자인데도 전쟁 끝나고 10년간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어요…… 목숨 걸고 자신을 지켜낸 영웅들을, 조국은 그렇게 대접했죠. 승리의 주역들을! 대학 동기에게 보낸 남편의 편지가 문제 였어요. '나는 우리의 승리를 자랑스러워할 수가 없네. 러시아인들의 시체로 우리 땅과 적을 땅을 뒤덮고 얻은 승리는. 우리의 피로 물든 승리는 말일세.' 남편은 곧바로 체포되었죠…… 견장도 뺏기고……
스탈린이 죽고 나서야 남편은 카자흐스탄에서 돌아올 수 있었어요…… 병든 몸으로. 우리는 아이도 없죠. 나는 전쟁을 회상할 필요가 없어요. 지금도 내 모든 삶이 전쟁중이니까…… "
p242
부상병이 아직 들을 수 있는 동안은……마지막 순간까지 '아니에요. 괜찮아요. 당신이 죽는다니 말도 안 돼요'라고 말해줬어. 입을 맞추고 안아주며 '걱정 마요, 괜찮아요'라고 위로도 했지. 이미 숨을 거둬서 눈이 허공을 보는데도 나는 계속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어…… 뭔가 안심시키는 말을…… 그 이름들은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얼굴들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어…… "
p295
어느 봄날……우리는 이제 막 전투가 휩쓸고 지나간 들판을 따라 걸으며 부상병들을 찾아요. 온통 짓밟힌 들판. 저만큼 전사한 병사 두명이 보여요. 젊은 우리 병사와 역시 젊은 독일군 병사가 어린 밀밭에 하늘을 보고 누워 있죠…… 하지만 전혀 죽은 사람들 같지 않아요. 그저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을 뿐…… 나는 지금도 그 눈길이 잊히질 않아요……
p507
이제야 모든 걸 말할 수 있게 됐어. 묻고 싶어……전쟁 나고 몇 달 사이에 수백만의 병사와 장교들이 포로로 붙잡힌 게 누구 때문이지? 알고 싶어……전쟁 전에 우리 붉은 군대의 훌륭한 지휘관들을 독일 첩자니 일본 첩자니 몰아세우고 총살시켜서 다 죽여버린 게 누구지? 정말 알고 싶다니까……히틀러가 탱크와 전투기를 만들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그때, 부됸니 기병대만 믿고 두 손 놓고 있던 게 누구냐고? 누가 '우리 국격은 철통같이 튼튼하다……'이따위의 말로 우리를 안심시켰느냔 말이야? 전쟁 나자마자 우리 군대가 탄환 남은 거나 걱정하는 신세가 된 게 누구 책임이냐고……
묻고 싶어……이제는 물을 수 있어……내 인생은 어디 있지? 우리 인생은?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입을 닫은 채 살아. 남편도 침묵하고. 지금도 우린 무섭거든. 두려워……이렇게 고통 속에서 죽어가겠지. 그게 나는 부끄럽고 서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