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자료

일본 남알프스 산행자료

한 용 석 2008. 7. 8. 04:52
[해외산행/일본 남알프스] 후지산 바라보며 장쾌한 능선에 서다
히로가와바라~기타다케~아이노다케~노우도리다케~다이몬자와 2박3일 산행

일본 야마나시현에 있는 미나미(南) 알프스의 기타다케(北岳)에 다녀왔다. 3,000m가 넘는 봉이 30개도 넘는 산악대국 일본에서 후지산이 3,776m로 제일 높고, 기타다케가 두번째로 3,193m, 세번째가 호다카다케의 3,190m, 네번째가 아이노다케로 3,189m, 다섯번째가 바로 필자가 작년에 갔던 야리가다케의 3,180m 순서다. 후지산을 제외하고 2위부터 5위까지는 모두 고만고만한 봉우리들이다.

이번 남알프스 트레킹은 한국산악회의 해외원정 프로그램으로서, 8월16일부터 20일까지 4박5일 일정이다. 참가자 18명 중에는 최고령인 문희성 전 회장을 비롯해 남정현 전 회장, 최홍건 현 회장, 이강수 감사, 정준모 이사, 전인찬 사무국장이 있고, 회원 중에는 이재광 전 대우건설 전무, 김현진 전 대우기전 전무, 마석일 교수, 신효순 공학박사, 오정일 의학박사, 유일한 여성이면서 일본인인 나카가와 히데코 여사, 박석희 한국산악회 등산학교 강사 등이 대거 참여하는 바람에 주선 여행사인 일본탐험(Adventure Japan Trekking)에서는 노진강 사장이 직접 가이드로 따라 나섰다. 48세의 전문산악인인 노 사장은 일본에서 22년을 살면서 학사, 석사를 마치고 현재 박사 과정을 하고 있다니 일본에 관한 한 가방끈이 긴 고급가이드다.

▲ 3,193m의 기다다케 정상으로 연결된 능선.

한여름에도 눈밭이 가늘고 길게 이어져

일행 19명(가이드 포함)은 8월16일 인천 국제공항에서 이륙하여 오후 4시40분쯤 나고야 중부국제공항에 착륙했다. 버스를 타고 중앙고속차도(4차선 고속도로)를 3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곳은 첫날밤 묵을 스와시 백화호변에 위치한 상고가쿠(山幸閣) 호텔이었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는 산행과 관련하여 일행에게 두 가지를 당부했다. 절대로 가이드를 앞지르지 말라는 것과, 등산에 동원되는 우리 몸의 중요기관은 심장과 무릎과 허리이지만 이들 기관들이 호흡을 통해서 리드미컬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된다는 취지의 당부였다. 등산 고수들에게 훈수하는 것 같았지만 등산 요령을 잘 지적한 말이라 생각했다.

버스로 호텔을 떠나 약 2시간30분 정도 좁은 포장도로를 올라가다가 더 이상 버스가 올라가기 어려운 지점에 하차한 후 일행은 다시 대형 택시 2대로 바꾸어 타고 1,530m 지점에 위치한 히로가와바라(?河原)라는 곳에 도착했다. 여기가 출발지점이다. 쉼터가 있는 작은 공간에 세 사람의 얼굴이 동판으로 음각되어 있는데, 월터 웨스틴이라는 영국인과 일본인 두 사람이다. 이들 세 사람이 미나미 알프스의 개조라고 한다.

▲ 히로가와바타에 있는 일본 알프스 개조(開祖) 기념비 앞.
오전 8시10분경 출발하려는데 부슬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모두들 배낭커버를 씌우느라 부산한테 내 방수배낭은 100% 방수되니 참 편리하다. 지리산과 일본 북알프스에서 커버 씌운 보통 배낭을 메고 5시간 이상 비를 맞아 보니 배낭은 물론 속에 있는 옷가지도 모두 젖어 버리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의 악몽을 극복하기 위하여 구입한 캐나다제 완전방수 배낭이 비 내리는 지금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된 셈이다.

45도 정도의 급경사를 오르는데 왼쪽으로 설전(雪田)이 보인다. 북알프스 것보다는 얇고 폭이 좁은데, 정상쪽으로 꽤 길게 뻗어 있다. 비는 조금씩 뿌리다가 그치기도 하고 구름은 해를 가리고 있어서 쨍쨍 내리쬐는 것보다 산행하기에는 좋은 조건이다. 설전이 거의 끝나는 고도 약 2,700m 지점의 바위 밑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아침식사를 한 지 꽤 오래 됐고, 운동량이 많아서인지 일본식 주먹밥이 꿀맛이다.


7시간 반만에 기타다케 정상 밟아

너덜지대 사이로 간간히 흙더미가 드러난 곳에는 야생화들이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불과 10cm 정도의 야생화들이 어떻게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하다. 이강수 감사는 디지털카메라로 야생화 담기에 여념이 없다.

칼바위 모양의 급경사 오르막에는 곳곳에 나무사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비가 조금 그치고 앞 능선이 구름 사이로 들락날락 보이는데, 3,015m 지점의 안부에 이르러 선두조가 잠시 휴식을 취했다. 멀리 오늘 밤 묵을 기타다케 산장이 보이고, 이곳에서 정상까지는 30분 거리라는 표시판이 서 있다.

히로가와바라를 출발한 지 약 7시간30분만인 오후 3시30분경 선두조가 드디어 기타다케 정상에 올랐다. 해발 1,530m에서 3,193m에 올라왔으니 고도 1,663m를 높인 셈이다. 정상은 꽤 넓어서 약 200평 정도는 됨직하다.

선두조 5, 6명은 정준모 이사가 가지고 온 45도 짜리 안동소주를 정상주로 한 잔씩 마셨다. 목으로 넘어가는 안동소주가 짜릿한데 카! 하는 소리가 요란하다. 기분이 좋아진 일행 중 누군가 정상주도 13579로 마셔야 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이에 동참하여 3잔 이상 마신 게 나중에 화근이 될 줄은 그 땐 몰랐다. 일행 전원이 아무런 사고 없이 정상을 밟았고, 누군가 정상에서 만세삼창을 하자고 제안했다. 한국산악회가 매년 8월15일 12시 백운대 정상에서 “대한민국 만세! 남북통일 만세! 한국산악회 만세!”의 예를 따르려는 것이다.

▲ 기다다케 정상에서의 기념촬영.
정상에서 약 40분쯤 머물다가 오후 4시10분 숙소인 기타다케 산장을 향하여 하산하기 시작했다. 너덜지대가 처음부터 꽤 가파르다. 배낭을 둘러메고 일어나니까 몸이 약간 휘청거린다. 아뿔사! 정상주를 내 실력에 비해서 좀 많이 마셨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로 뒤에서 이강수 감사가 휘청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짧게 한 마디 던진다. “형님, 한 번의 실수가 평생을 후회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 조심조심 한 발짝씩 내려와 산장에 도착했다. 뒤돌아보니 박석희 회원이 정상까지 오르면서 하체가 풀린 신효순 박사의 배낭을 자기 배낭에 새끼 배낭처럼 매달고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배낭 두 개 합치면 적어도 40kg 이상 될 것 같은데 강인한 체력이다.

산장에 들어서자마자 젖은 등산화와 등산복은 건조실에 집어넣고 지정받은 잠자리를 정리하고 나서 곧바로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일본식 식사는 흰쌀밥 한 공기, 미소시루, 생선 한 토막과 몇 가지 반찬이 전부다. 일행 중 어느 독지가가 부담하여 나마비루(생맥주) 500cc를 한 잔씩 돌린다. 3,000m 고산에서 웬 생맥주인가! 산 아래에서는 한 잔에 270엔 한다는데 여기서는 900엔씩 받는다고 한다.

시원하게 한 잔 다 마시고 식사 끝내고 어물어물 지나니까 소등시간인 오후 8시가 되었다. 자리에 누웠으나 과로한 탓인지 여기저기 소란스러운 교향곡(코 고는 소리와 가스방출 되는 소리) 때문인지, 잠은 안 오고 이리저리 뒤척이는데 누운 지 약 2시간 후부터 속이 메슥거리고 뒷골이 당긴다. 전형적인 고소증세가 오는 것임을 느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때 고라파니 대피소에서, 그리고 키나발루의 라반라타 산장(3,300m)에서 두 번씩이나 과속으로 빨리 간 덕분에 고소증세를 톡톡히 겪은 바 있는데, 이번에는 정상주 때문에 세 번째 경험하는 고소증세다.

똑같이 다 마시고도 멀쩡한 사람도 있는데 나는 그 사람들 보다 알콜 분해능력이 떨어지는가 보다. 아무런 대책 없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아있다가 마침 서울에서 한 병 가지고 온 매실청(엑기스)을 진하게 물에 타서 마시고 나니 속이 신기하게도 착 가라앉는다. 매실이 나의 위급상황을 구해 준 셈이다.

노우도리다케에서 표고차 1,200m 하산

오늘 산행 첫 날 오르막 등산길에서는 누구든지 숨이 가쁘고 다리도 아픈데 그래도 오랜 시간의 산행이 지루하니까 앞뒤로 붙어서 가는 다른 사람과는 별의별 대화를 다 나누면서 피로함을 잊으려고 한다. 오늘도 오르는 길에서 뒤따르던 일행 중 한 사람과 꽤 거창한 역사토론을 했다.

지난 밤을 이럭저럭 보내고 나서 새벽 4시30분쯤 일어나 보니 산장 창밖으로 마름모꼴의 후지산이 빤히 보인다. 쾌청이다. 간단한 식사 후 오전 6시 다음 목적지로 향해 출발했다. 하늘은 맑고 기온은 19℃이니 산행에는 최적의 조건이다. 게다가 오늘은 첫날같이 계속 오르막이 아니라 3,000m대를 오르락내리락 한다니까 모두들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주능선 밑으로는 양쪽 모두 깎아지른 급경사인데 수목한계선이 뚜렷이 보이고 계곡 사이에는 흰 구름이 맴돌고 있다. 그 구름 사이에서 갑자기 무지개가 나타난다. 무지개는 하늘 위로 쳐다봐야 있는 줄 알았는데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무지개는 난생 처음이다. 능선 오른쪽 멀리로 중앙알프스의 2,800m급 능선들이 보이고, 훨씬 더 뒤에 있다는 북알프스는 보이지 않는다.

▲ 아이노다케를 오르는 길목.

오전 8시10분 일본 제4위봉 아이노다케에 이르렀다. 어제 오후에 올랐던 기타다케와 다음 목적지인 노우도리다케(3,025m)의 중간에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어제 다른 사람 배낭까지 챙겨 가지고 내려온 박석희 등산학교 강사가 뒤따르기에 어제 정상주 마시고 고소 증세가 있었다고 하니 3,000m 이상 고산에서 독주(40도 이상)를 마시면 위험천만이라고 귀띔한다. 또 한 수 배웠다. 아이노다케에서는 반대쪽에서 올라온 일본 남녀 대학생 4명을 만났다. 장비는 허술한데 젊어서 그런지 고단한 기색이 하나도 없다.

▲ 아이노다케로 오르는 오르막 너덜길 통과.
아이노다케를 출발한 지 약 2시간 후인 오전 10시쯤 노우도리고야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점심을 시켜 먹으려 했으나 산장 주인은 준비가 없어 해줄 수 없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배낭에 가지고 간 라면을 큰 냄비에 끓여서 한 그릇씩 먹기로 했다. 가이드가 산장에서 깡통 맥주를 한 보따리 구해 와서 하나씩 돌린다.

일행의 점심식사가 1시간 넘게 걸렸다. 일행 중 누군가 지나온 길 어느 휴식장소에 선글라스를 놓고 와서 그것을 찾으러 왔던 길을 되돌아 올라갔으니 그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이다. 앞으로 어려운 코스가 별로 없다는 가이드의 말에 일행들은 긴장이 좀 풀리고 맥주도 한 잔씩 걸친 김에 여러 사람들이 20~40년 전에 겪었던 군대 얘기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가라마츠 침엽수 군락의 삼림욕 효과

선글라스 수색대가 도착하지 않았으나 일정 때문에 일행은 배낭을 메고 다시 출발한다. 변덕스러운 구름이 능선과 계곡이 짙게 끼여 시야가 50m도 안 된다. 12시50분경 노우도리다케에 도착해 보니 정상은 엄청난 돌무더기이고 표시판에는 ‘고산식물과 뇌조(雷鳥)의 보호구역’이라고 쓰여있다. 이곳에서 다음 목적지인 오늘 밤 숙소 다이몬자와까지는 무려 1,200m 이상 고도를 낮추는 본격적인 하산길이다.

하산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자 평탄한 갈림길이 나왔다. 4~5m쯤 되는 삼각대 철구조물이 있고 그 밑에 종이 하나 달랑 매달려 있다. 등산객이 위급 신호를 하든가 뒤떨어진 일행에게 선두가 방향을 알리기 위해서 종을 치는 모양이다. 그런데 종 바로 옆에 일본어로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이 장소에서 소화 43년(1968년) 1월4일 25세의 청년이 올라왔다가 안개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탈진하여 조난당했기에 그 청년의 부모가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여 이 종을 세우고 표시하였노라.’

선글라스를 찾으러 갔던 회원 둘이 허탕 치고 뒤따라오는 모습이 멀리 보인다. 해발 2,500m쯤의 수목한계선을 지나면서부터 나무들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내리막 경사가 몹시 급하고 질척거려서 좀 위험하다. 뒤따르던 나카가와상이 잘못하여 돌을 하나 위에서 건드리니까 내 옆으로 스쳐 아슬아슬하게 굴러 내려간다.

얼마쯤 지나니까 가라마츠라고 하는 침엽수 군락지가 나타난다. 침엽수에서는 피톤치트라고 하는 나쁜 미생물을 죽이는 물질이 방출되니까 같이 동행한 가이드와 함께 웃통을 벗고 산림욕하면서 후발대를 기다렸다.

이어지는 하산길은 계곡수가 돌무더기 사이로 흐르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지리산 어느 계곡과 비슷하긴 한데 그 규모는 모두 두 배 이상 크고 경사도 더 가파르다. 일본 산에서는 우리나라같이 계곡에서 흐르는 물에 발 닦고 세수하는 게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스스로 잘 지킨다고 하니 우리 일행도 로마법을 따르게 됐다. 

오후 4시30분 선두그룹은 다이몬자와에 도착했다. 산장 바로 옆으로 계곡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흐른다. 오늘 밤은 자연의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게 되었다. 다이몬자와 산장은 식수가 풍부하고(기타다케에서는 식수 1리터에 100엔 받음), 500엔을 넣으면 4분간 더운 물 샤워가 가능한 시설도 있다. 저녁식사와 소등취침 시각은 기타다케 산장과 같고, 식사제공하고 하루 숙박비가 1인당 8,000엔 받는다.

▲ 통나무 다리를 건너는 일행.
새벽 3시30분쯤 일찍 눈을 뜨고 용변 보러 밖으로 나와 보니 하늘에 초승달이 떠 있고 별도 많이 보인다. 지난 밤에 소나기가 한 번 지나갔지만 오늘은 쾌청일 것 같다. 아침 식사 후 일렬종대로 출발했는데 계곡물이 점점 커지면서 통나무 다리를 세 번 건너야 했다. 둥근 통나무 2개를 얼기설기 엮어서 길이가 약 10m 정도 되는데 건너기가 만만치 않다.

비에 젖은 둥근 통나무가 미끄러운데 배낭 메고 폴 잡고 건너려니 밑으로 흐르는 급류가 겁난다. 두 발과 폴 두 개를 모두 통나무를 짚으니까 4군데 중 하나만 삐끗해도 균형이 깨져 떨어질 것만 같다. 나중에 남정현 회장 설명을 들으니까 폴은 통나무를 짚지 말고 균형만 잡아주고 그냥 걸어서 건너는 게 안전하다는 것이다. 또 한 수 배웠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산길은 아주 아름다운 것이 지리산 대성계곡이나 빗점골과 비슷하다. 하늘은 짙은 수목으로 덮여 있고 옆으로는 요란하게 물이 흐르니 오늘이 진짜 웰빙산행이다. 걷다가 커다란 침엽수를 만나면 가끔씩 멈추어서 이마를 나무에 대곤 하니까 뒤따르던 나카가와상이 무엇하는 거냐고 묻는다. 사실은 나무의 기를 좀 받으려고 한다는 말을 영어로 하기 어려워 “Thanks GOD for giving this big tree” 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고도가 낮아지고 계곡수가 합수되면서부터 강 같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50m 이상 되는 출렁다리가 여러 곳에 있다. 출렁다리 입구에는 ‘위험하니 한 사람씩 건너시오’란 경고문이 붙어 있다. 전진할 때마다 다리가 출렁거리는데, 그 리듬을 잘 맞추어야지 엇박자를 놓으면 고생 좀 하게 생겼다.

계곡수를 굵은 파이프로 연결하여 낙차를 만들어서 건설된 소수력발전소가 여기저기 보인다. 드디어 목표지점 종착점인 나라다가 가까워진 모양이다. 평탄한 포장도로를 따라 걷다가 다리 하나를 건너니 조금 멀리서 우리를 태우고 갈 버스기사가 손을 흔든다. 마침내 2박3일 일본 남알프스 산행을 무사히 마치는 순간이다.


 

글 송헌일 한국산악회 평생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