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자료

산이름 유래 / 형제봉

한 용 석 2008. 7. 1. 17:42
산이름 유래 / 형제봉
비슷한 키로 다정하게 나란히 솟은 산
형제봉(兄弟峰·463m)은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과 종로구 평창동 사이를 경계하면서 험요한 형세로 힘차게 솟은 보현봉의 지맥이다. 일부 등산안내서에는 ‘형제봉은 산이름의 유래와 그 시원을 알 수 없고 다만 근년에 붙여진 이름 같다’라고 풀이했는데, 이는 큰 오류다. <숙종실록> 49권 36년 10월3일 갑자일조에 사직 이광적이 도성의 방비책과 내수외어의 방책을 진계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 속에 이미 형제봉의 이름이 보인다.
형제봉은 <숙종실록> 외에도 <근세조선지도> <조선지지자료> <한성도> 등에도 그 이름이 보인다. 또 <정조실록> 47권에는 ‘동쪽으로 정릉(형제봉) 뒷봉우리, 서쪽으로 안현(鞍峴·무악산) 근처, 남쪽으로 부아현(負兒峴) 동쪽과 서쪽 지역은 대궐 안이 훤하게 굽어보이는 곳이니 피를 심기도 하고 소나무를 심기도 하라고 하였다’고 기록해 형제봉이 정릉의 후봉(后峰)으로도 통용되었던 사실을 방증해주고 있다. 그러나 1788년 <도성도>와 <수선전도> <한양도> <북한지> 등에는 형제봉을 서로 구분치 않고 구준봉(狗峰)으로 기록하였다.
형제봉이란 산이름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전해지는 온조 비류 형제의 등정설이다. 즉 온조와 비류 형제가 나라터를 잡기 위해서 이 산에 함께 올랐기 때문에 형제봉이라는 이름이 생성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설은 고문헌의 기록을 기초로 하여 후세사람들의 변질된 사고가 가탁된 것으로 추찰되며, 백제건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부정하고 있는 견해다.
또 임진 병자년의 양란 이후에 양명학의 학풍과 도가적 술법을 계승한 정길준 정사준 형제가 말세의 운수와 천문지리를 관찰하여 무극대도의 참진리를 참구하기 위해서 이 곳에서 유거했기 때문에 형제봉이라는 산이름이 생성되었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형제봉의 동남쪽 아래에 있는 큰 바위굴에서 살았던 이들 형제는 청학동처사를 자처하면서 이 바위굴에서 용출하는 약수에 솔잎가루만으로 생식했고, 풍류도인처럼 살며 신선의 경지를 이루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기록이 미흡하여 진위를 밝히기가 모호하다. 다만 이들 형제가 유거했다는 큰 암굴(100여 명이 대피할 수 있는 바위굴)은 분명히 전해지고 있다.
달리 전해지는 유력한 설은 세조의 명을 받아서 수양대군, 안평대군 형제가 천문을 관찰하기 위해 올랐기 때문에 산이름이 후일 형제봉이 되었다는 내용인데, 관련사실이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세조실록> 등에 자세히 전해지고 있다. <동국여지비고>의 경도편에는 “세종이 규표(圭表)를 바로할 때, 세조 및 안평대군과 다른 유신(儒臣)들을 시켜서 이 산의 보현봉에 올라가 해의 출입하는 곳을 관찰하게 하였는데, 돌길이 위험하고 그 아래가 한량없이 깊으니 안평대군 이하는 눈이 아찔하고 다리가 떨려서 앞으로 나가지 못하였지만, 세조는 걸어가기를 나는 듯이 하며 순식간에 올라가고 내려오니, 보는 이들이 절찬하고 탄복하면서 따를 수 없다고 여겼다’고 하였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형제봉의 이름 유래는 단순히 산의 모양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형제봉은 463m의 큰 형제봉과 461m의 작은 형제봉이 서로 마주보고 선 형세인데, 이런 모양이 사람들에게 마치 형제처럼 우애롭게 보인다 하여서 불렸을 것이다. 따라서 비슷한 높이로 솟은 두 산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형제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알려진 곳만 거론해도 전국에 무려 30여 개나 된다.